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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저수지 기행 ⑧ 깊이울 저수지와 역사 유적
김창흡, 이정남, 이시술 선생 묘역
2020-01-29 조회수 : 4547

시민기자 이화준

포천 신읍동 곰 고개에 있는 삼연 김창흡 선생을 기리는 요산단과 심곡리에 있는 깊이울 저수지와 왕방산 암벽공원 그리고 이정남과 이시술 선생의 묘역을 돌아보며 역사 이야기를 풀어본다.


▲요산단 전경ⓒ시민기자 이화준

경기도의료원 포천병원에서 예비군 포천동대가 있는 곰 고개를 오르면 산 아래 빈터가 보인다. 이곳은 조선 헌종 때 창건하여, 1850년(철종 1)에 요산영당(堯山影堂)이라는 사액을 받은 요산사(堯山祠)가 있던 자리이다. 1871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영당이 훼철되자, 포천 유림은 “영당은 없어졌지만, 향사는 폐할 수 없다” 하여 그 터에 단을 만들고 향사를 이어왔다. 이것이 바로 요산단이다. 6·25 전쟁 때 그 단마저도 훼손되어 1967년에 포천 유림이 다시 발의하여 단을 만들었다.


▲ 김창흡 영정ⓒ시민기자 이화준

김창흡(金昌翕)ㆍ1653(효종4)~1722(경종2)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병자호란 당시 척화주의자로 유명한 청음 김상헌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영의정 김수항,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과 예조판서, 대제학 등을 지낸 김창협의 아우이다.

1673년(현종 14) 아버지의 명에 따라 진사시에 응시하여 일등으로 합격했다. 이후 과거에 발길을 끊고 백악 기슭에 낙송루라는 집을 짓고 독서와 산수를 즐기며 시작(詩作)으로 세월을 보냈다. 이렇게 해서 지은 시가 남아있는 것만 해도 500여 수에 이른다.

1679년(숙종5) 철원의 용화사에 우거하며 삼부연(三釜淵)의 절경에 매료되어, 호를 삼연(三淵)이라 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며 부친이 복권되어 영의정에 임명되자, 우의정 김석주의 천거로 장악원 주부를 제수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1689년(숙종1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자 아버지 김수항이 삭탈관직 되어 진도에 유배되어 사사되자 아버지의 임종을 지켰다. 1722년(경종 2) 영조가 세제로 책봉되자 세제시강원 진선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해 장형 김창집 등 노론 4 대신이 반역을 도모한다는 무고에 사사되자 충격을 받고 지병이 악화하여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76세이었다. 조정에서는 이조판서에 증직하고 문강(文康)의 시호를 내렸으며 숙종 묘정에 배향하였다.

성리학에 밝고 도학과 문장에 뛰어나 형제 모두가 율곡 이후의 대학자로 칭송되었다. 저서로는 삼연집(三淵集), 심양일기(審陽日記), 문취(文趣) 등이 있으며, 포천의 요산영당(지금은 요산단)을 비롯하여 춘천의 춘천영당, 양주의 석실서원, 양근의 미원서원, 강릉의 호해정영당, 덕원의 충곡사, 양구의 서암사에 제향 되었다.


▲ 김창흡 묘역ⓒ시민기자 이화준

1722년 4월, 현재 포천시 신읍동 요산단 뒤 부인의 묘지에 합장되었다. 묘역은 1994년 이후에 대대적인 정비를 시행하였다. 묘비 앞면에 ‘유인 경주 이씨 부 유명 조선 삼연 선생 김공 창흡 지묘(孺人慶州李氏祔 有明朝鮮三淵先生 金公昌翕之墓)’라 새겨져 있다.


▲깊이울 저수지ⓒ시민기자 이화준

곰 고개를 넘으면 신북면 심곡리에 이른다. 심곡리의 지명 유례는 깊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깊이울 또는 심곡(深谷)이라 하였다.

깊이울(심곡) 저수지는 홍수 예방과 농업용수 공급을 목적으로 1945년에 착공하여, 1946년에 준공하였다. 깊이울 저수지의 유역 면적[분수령을 경계로 하여 강우가 하천이나 저수지에 모여드는 구역의 면적]은 544ha이다. 총저수량은 23만 8,000t, 유효 저수량은 21만 7,000t이며, 사수량은 2만 1,000t이다. 둑의 길이는 210m, 둑 높이는 15m이다.


▲포천 왕방산 암벽공원ⓒ시민기자 이화준
왕방산에서 발원한 깊이울 계곡은 물 맑고 수심이 깊지 않아 가족 단위 야영객이 많았다. 이에 포천시는 2014년부터 왕방산 암벽공원 조성사업을 진행하여, 인공 암벽과 함께 이동식 캐러밴 7기와 수변공원, 샤워장, 조경 시설, 농특산물 판매장을 설치하여 2018년 개장하였다.


▲캠핑장과 암벽ⓒ시민기자 이화준

깊이울 유원지는 매년 3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캠핑장 시설을 운영하고 있으며, 예약은 유선전화(031-533-5155) 또는 깊이울유원지 캠핑장(http://gipiulvillage.co.kr)에서도 가능하다.

외북초등학교 인근 계류리에는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는 큰 묘역이 있다. 어떤 분의 묘역인지 궁금해 찾아보니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행 통훈대부 예빈시정 이공 정남 지묘, 증 정부인 함안 윤씨 부”라 기록되어 있다.


▲이정남 묘역]

이정남(李正男, 1585년(선조 18)~1653년(효종 4))
본관은 경주, 부친 백사 이항복과 모친 권율의 딸 안동권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시술(李時術)이다.

조호익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대동법을 시행한 김육 등과 교유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증광시 진사 3등 18위(100명 중 48등)로 합격하였고, 1625년(인조 3) 호조정랑‧통천군수에 임용된 것을 시작으로 1635년(인조 13)까지 사복시첨정‧강화경력‧통훈대부 행 한성부윤 등을 역임하였다. 묘는 경기도 평택에 있다가 아들 이시술 묘 옆으로 이장됐다.


▲이시술 묘역ⓒ시민기자 이화준

이시술(李時術, 1606(선조29)~1672(현종3))

자는 사강(士强), 본관은 경주, 백사 이항복의 손자이며, 부사 이정남의 아들이다.

1630년(인조8) 진사시에 3등 35위(100명 중 65등)로 합격하고 천거로 세자 익위사세마(世子 翊衛司洗馬)로 제수받았다. 그 후 형조, 공조 정랑을 지내고 1652년(효종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33명 중 11위)한 이후 어사가 되어 호남지방을 순무하였다. 1659년(현종 즉위년) 사은정사 홍득기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의주부윤으로 부임하였을 때는 문묘를 증수하고 수재들을 향교에 모아 학문에 정려하도록 힘썼다. 그러나 국경 범법자가 많아져 청나라의 노여움을 사 처벌받기에 이르렀다. 이때 이시술은 오직 “사생은 하늘이 정하는 바에 따를 뿐 인력으로 좌우할 수 없다”고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1665년(효종6) 형조참의, 대사간, 동부승지, 우부승지를 거쳐 병조참의와 호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669년(현종10) 병조참판에 제수되고, 1670년(효종1)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1671년 12월 병을 얻어 성남의 사제에서 졸했다. 실록에 “사람됨이 선량하고 근신함을 스스로 지켜나가 관직에 임하고 사물을 접할 때 잘못한 적이 없다.”고 적어 그의 인품과 재능을 높게 평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묘는 신북면 계류리에 있는데 묘갈명은 좌의정 박세채(朴世采)가 찬하였다.

왕방산에서 발원한 외북천은 깊이울 저수지를 채우고, 서에도 동으로 흐르는 계류를 만들어 조선의 뛰어난 인물 세 분의 묘역이 자리한 것 같다. 비 지정 문화재이지만 역사 속 인물들을 통해 우리 역사를 알아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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