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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저수지 기행 ⑨ 황금 연못 저수지와 성여완, 성석린 묘역
고려 충신 아버지와 조선의 개국공신 아들 이야기
2020-02-03 조회수 : 4918

시민기자 이화준
신북면 삼성당리에 있는 황금 연못 저수지와 자일리에 있는 성여완, 성석린 묘역을 함께 둘러보며 역사 이야기를 풀어본다.

황금 연못 저수지


▲황금 연못 저수지ⓒ시민기자 이화준

황금 연못 저수지가 있는 삼성당리는 삼성당(三星堂)이란 당집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황금 연못 저수지는 외북천을 따라 산과 산 사이 평야에 자리하고 있다. 언제부터 저수지로 이용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지금은 저수지보다는 낚시터로 이용되고 있다.

성여완, 성석린 묘역


▲창녕 부원군 문청공 성여완 유허비ⓒ시민기자 이화준

삼성당리와 경계하고 있는 고일리에는 포천시 향토유적 21, 22호로 지정된 성여완, 성석린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87번 지방도에서 외북천을 가로지르는 기곡교를 건너면 창녕 성씨 묘소 입구를 알리는 표지석과 함께 창녕부원군 문청공 성여완 유허비와 독곡공 성석린 신도비가 있다. 묘역은 재실인 묘덕재를 지나 고일2리 마을을 통과해 논길을 따라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성여완, 성석린 묘역 위성 지도ⓒ시민기자 이화준

이전에도 성여완, 성석린 묘역을 찾는데 무려 3번이나 헛걸음을 했던지라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묘역을 찾았다. 묘역까지 이어지는 논길은 포장되었지만 이후 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비포장이다. 승용차라면 차 바닥이 긁힐 우려가 있으니, 비포장 길부터 5분 정도 걸어가자.


▲창녕성씨천 암각문ⓒ시민기자 이화준

산길을 걷다 보면 제대로 가는지 의심스럽다. 이때 만난 ‘창녕성씨천(昌寧成氏阡-창녕성씨의 묘가 있는 묘도)’이란 암각문을 만난다. 이곳을 지나면 바로 성석린 묘역이다.


▲성석린 묘역ⓒ시민기자 이화준

성석린(成石璘, 1338(고려 충숙왕 복위 7년) ~ 1423(조선 세종 5))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자는 자수(自修)이고, 호는 독곡(獨谷)이다. 부원군 성여완의 장남이다.

1357년(공민왕 6)에 문과에 급제한 뒤 해주목사, 성균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383년(우왕 10) 밀직제학으로 있을 때 왜구가 침입하자 양백연의 부하로 조전원수가 되어 이를 격퇴하여 윤성좌리공신 되었고, 동지밀직사사에 올랐다가 창원군에 봉해졌다. 그 뒤 양광도도관찰출척사가 되어 흉년을 구제하기 위한 의창(義倉)을 설치케 하였으며, 문하평리 겸 대사헌으로 이성계 등과 우왕, 창왕을 패하고 공양왕을 세운 공으로 찬화공신 창선군충의군에 봉해지고, 예문제대학, 문하찬성사에 올랐다.

1392년에 조선이 개국하자 초대 판한성부사를 역임하였고, 제1차 왕자의 난이 있은 뒤 성석린은 태조의 옛 친구로서 함흥차사가 되어 태조와 태종을 화합하게 하였다. 1399년(정종 1) 문하우정승이 되고 창녕백에 봉해지며 좌정승에 올랐다. 1401년(태종 1) 정명공신 3등으로 창녕부원군에 봉해졌으며, 1415년(태종 15) 영의정에 올랐으며 궤장을 하사받았다. 1423년 향년 86세로 사망하자, 세종은 세자시절 스승이었던 성석린 선생을 애도하고, 직접 제문을 지어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다. 시사에 뛰어나고, 초서를 잘 썼으며, 왕명으로 ‘태조 건원릉 비문’을 썼다. 저서로는 ‘독곡집’이 있다. 시호는 문경이다.


▲성석린 묘역 근접사진ⓒ시민기자 이화준

묘역은 전면에 자연석으로 3m가량의 석축을 쌓았으며, 묘 둘레는 삼각형에 가까운 호석으로 둘렀다. 묘는 부인 화순택주 순흥군 안씨와 합장묘이다. 오른쪽의 화강암으로 된 묘비는 옥개와 대좌를 갖추었으며, 앞면에는 ‘창녕부원군 시 문경공 성공묘’라 하였으며, 뒷면의 ‘영락21년계미3월일입석’이라고 음각된 것으로 보아 1423년(세종 5)에 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포천시에서는 향토유적 제22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성여완 묘역ⓒ시민기자 이화준

성여완(成汝完, 1309년(고려 충선왕 1) ~ 1397년(조선 태조 6))
고려말의 문신으로 초명은 한생(漢生), 호는 이헌(怡軒)이며, 판도총랑 성군미의 아들이다.

1336년(충숙왕 5)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검열, 군부정랑, 상서우승, 지형부사, 어사정승, 전법판사를 거쳐 해주와 충주의 목사를 역임하였다. 공민왕 때 민부상서, 우왕 때 정당문학상의에 이르러 창녕부원군에 봉해졌다. 1392년(공양왕 4)에 정몽주가 피살되자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졌음을 알고 포천 왕방산 아래 계류촌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왕방거사(王方居士)라 하였다.

조선 개국 후 예우직으로 겸교 문하시중 창성부원군에 봉해졌으나 사임하고 절개를 지켰다. 또 태조가 경회루에서 큰 잔치를 베풀고 초청하자 평복인 흰옷을 입고 참석해 고려 충신의 절조를 나타냈다고 한다. 1397년(태조 6) 89세로 사망하자 조정에서 쌀과 콩 100석을 하사하여 장사를 돕도록 하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으로 묘는 부인 경안택주 금성나씨와 합장묘이다.


▲성여완 묘역 근접사진ⓒ시민기자 이화준

묘 주위에는 자연석으로 곡장을 둘렀으나 반은 허물어진 상태이고, 앞면은 자연석의 석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오른쪽 화강암 묘비의 상부는 투구형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앞면에는 ‘창녕부원군 시호 문정공 성공’으로 쓰여 있고, 뒷면에는 ‘창녕백 석린, 개성유수 석용, 예문관 대제학 석인, 중랑장 석번. 건문 3년 신사 정월 일 입석’이라 음각되어 있는데, 그의 자손이 1401년(태종 1)에 건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묘역에는 상석, 향로석, 묘비 2기, 동자석, 문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어서 조선 초기 묘제와 석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포천시에서는 향토유적 제21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선비로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었던 아버지 하지만 장성한 아들의 앞길까지 막을 순 없었다. 아들 또한 그가 선택한 새로운 나라, 새 임금을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려말 조선 초의 어수선한 역사가 한 가정에서도 일어났다. 우리는 이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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