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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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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흘읍 문화역사 탐방 ①
2018-01-05 조회수 : 4608

소흘읍은 경기도 포천시 최 남부에 위치한 읍이다. ‘소(蘇)’는 차조기나 소나무로 풀이되고, ‘흘(屹)’은 우뚝하다는 뜻이다. 주위에는 산이 많으며 나무와 풀이 무성하였던 이유로 소흘읍이라 부른 것이라고 한다.
 
○ 범바위(효자바위)와 효자 오백주 전설


▲범바위ⓒ시민기자 이화준

43번 국도를 이용해 포천으로 들어올 때 축석고개를 넘으면 ‘호국로’라 표기된 큰 바위가 보인다. 그 뒤로 작은 공터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범바위와 문화재 안내표지판을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보았을 것이다.
 
포천읍 어룡리에 실존한 오백주(1643~1720)는 부친이 위독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어느 날 밤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석밀(석청)을 먹으면 부친의 병이 나을 거라 하여, 산을 헤매다 호랑이를 만났다. 병상의 부친을 누가 돌보냐며 통곡하자, 호랑이는 사라지고 바위만 남아 그 틈에서 석청이 흘러내렸다. 오백주의 효성에 산신령이 호랑이를 바위로 변하게 했다고 하여 범바위(효자바위)라고 불렀다. 오백주는 매년 이 바위에 와서 부모의 만수무강을 빌었다고 해서 지명이 ‘축석령’이다.

범바위 전설도 특이하지만, 이곳이 포천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포천천의 발원지라는 것도 알고 지나가자. 포천천은 소흘읍 이동교리의 축석령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영평천에 합류하고, 한탄강과 임진강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지방 2급 하천으로 상수원과 농업용수로 사용되는 포천의 대표 하천이다.

○ 무란길(이동교리) 느티나무 보호수
  

축석초등학교의 무란길 보호수는 포천에서 1호로 지정된 보호수다. 대략 500년 된 느티나무로 둘레 583cm, 높이 20m에 이른다. 예로부터 ‘서민은 소나무로 만든 집에서 소나무로 만든 가구를 놓고 소나무로 된 기구를 쓰다가 죽어서도 소나무 관에 묻히지만, 양반은 느티나무로 지은 집에서 느티나무 가구를 놓고 살다 느티나무 관에 실려 저승으로 간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느티나무 목재는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친다.

   
▲무란길 보호수(좌), 무봉리 은행나무 보호수(중), 거친봉이 보호수(우)ⓒ시민기자 이화준

○ 무봉리 보호수

무봉리(茂峰里)는 앞뒤로 큰 봉우리가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거친봉이 또는 무봉이라 하였다. 자연마을로 기와집말·막골·벌말·수벌말·거친봉이가 있다. 막골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용상골에서 유숙할 때 군사들이 막을 치던 곳에서 연유한 이름이다.

무봉리 보호수는 수령이 300년 된 은행나무로 높이 24m, 둘레 5.3m이다. 은행(銀杏)은 은빛 나는 살구씨와 닮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중국에서 부르는 이름으로는 잎이 오리발을 닮아 압각수(鴨脚樹), 할아버지가 심은 나무의 열매를 손자 대에나 얻을 수 있다고 하여 공손수(公孫樹)라고 하며 그 밖에 백과목(白果木), 행자목(杏子木) 등이 있다. 중국에서 은행나무를 공자(公子)의 행단에 많이 심었는데 이를 본떠서 우리나라에서도 문묘나 향교, 사찰의 경내에 많이 심었고, 신목이라고 하여 악정을 행하는 관원을 응징하기 위해 관가의 뜰에 심기도 하였다.

○ 거친봉이 보호수와 태봉
 
거친봉이(무봉 2리)는 막골 남쪽에 있는 큰 마을이며 무봉 3개리 중 가장 큰 마을이어서 ‘원무봉’이라고도 불렸다. 동네 이름이 ‘거친봉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옛날부터 마을 앞뒤로 큰 산봉우리가 험하고 높아서다. 43번 국도가 생기기 이전에 많은 사람이 거쳐 갔다고 하여 ‘거친봉이’라고도 한다는 설이 있다.

거친봉이 보호수는 300년 된 느티나무로 포천시 보호수 3호다. 높이는 14m, 둘레는 3.8m이다. 보호수 주위로 오래된 느티나무 2그루가 더 있다. 특이하게 보호수 옆에 태봉과 금표가 함께 있다.


▲옹주 태봉ⓒ시민기자 이화준

무봉리 태봉은 1735년에 태어난 영조의 화유옹주 아기씨의 태실이다. 금표에 의하여 엄격하게 보호를 받고 있던 이 태실은 일제 강점기에 문화재 조사라는 명목 아래 태 항아리가 도굴되었다. 이후 방치되다가 최근에 무봉리 주민들이 마을 느티나무 보호수 앞에 표석과 옹석을 옮겨 놓았다. 옹석의 규모는 둘레 3m, 지름 1m, 높이 50cm인데, 그 위에 높이 23cm, 지름 1m의 개석이 원래 모습으로 올려 있다.

○ 충목단(忠穆壇)

충목단은 경기도기념물 제102호로 세조에게 폐위당한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실패하여 처형된 사육신(死六臣) 중 한 분인 벽량 유응부(兪應孚)와 한남군(漢南君) 이어, 그리고 병사(兵使) 양치(楊治)의 충정을 기리기 위해 위패를 모신 제단이다.


▲충목단ⓒ시민기자 이화준
유응부 장군은 소흘읍 무봉리 출생이다. 단종 복위 계획이 탄로 나 세조의 문초를 받던 중, “명나라 사신 초대연에서 족하(足下: 대등한 사람에 대한 존칭)를 죽여서 폐위시키고 단종을 복위시키고자 하였으나 간사한 김질이 그대에게 고발하여 이 꼴이 되었으니 무슨 일을 하겠소. 빨리 나를 죽여 주오”라고 대답하였다. 모진 국문을 받다가 유응부를 비롯한 사육신은 거열형(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매어 찢어 죽이는 형벌)에 처형된다. 그러나 1691년(숙종 17년) 12월에 사육신은 복관된다.

▲유응부 장군 유허비ⓒ시민기자 이화준

이곳에는 유허비(遺墟碑)와 비각이 있다. 유허비는 영조 22년(1746)에 조성되었으며 비문의 글씨는 정승을 지낸 유척기가 썼고, 이를 보호하는 비각의 중건기는 김평묵이 썼다. 총목단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64년(고종 1)에 폐쇄되었다가 1890년(고종 27) 복원하여 한남군 이어와 퇴은공 양치를 추가 배향하였다.

*참조 :
한국지명유래집 중부 편 지명, 2008. 12. 국토지리정보원
디지털 포천 문화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소흘읍 문화역사탐방 ② http://news.pocheon.go.kr/aview.php?aid=17272

시민기자 이화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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