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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포천 고모호수공원
2020-06-04 조회수 : 7224

시민기자 변영숙


ⓒ시민기자 변영숙

수도권 핫한 데이트 & 드라이브 코스 고모호수공원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의 중심부인 포천 국립수목원에서 초록 숲길을 따라 자동차로 6km 정도만 더 달리면 아담한 '고모호수공원'이 반긴다. 수도권 최고의 나들이 장소이자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는 곳이다.

마을 앞에 효부 고 씨의 무덤이 있어 고묘앞 마을이라 불린데서 ‘고모리’라는 마을 이름이 유래한다. 고모리저수지는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1984년 만든 인공저수지지만 최근 주변 정비 사업을 통해 휴식과 문화가 있는 ‘고모호수공원’으로 재탄생하였다.


ⓒ시민기자 변영숙

규모는 작지만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 호젓한 호수 둘레길에 전망 좋은 카페와 레스토랑에 맛집까지. 최근 대규모 베이커리와 브런치 카페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서면서 호수풍경을 모두 이들 카페에 빼앗기는 것이 아닌가 걱정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던 날 고모호수공원을 찾았다. 호수 산책은 비 내리는 날이 제격이다. 비에 젖은 흙냄새와 나무와 풀, 꽃들이 뿜어내는 향기를 폭풍 흡입할 수 있으니 말이다. 비와 물안개에 젖은 촉촉한 수채화 같은 호수풍경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 좋다.


ⓒ시민기자 변영숙

서걱했던 마음도 갓 구워낸 카스테라처럼 촉촉해지고 부드러워져 세상의 모든 것이 싱그럽고 새롭게 보인다. 제철을 만난 꽃들과 산책로를 따라 핀 작은 야생화들이 ‘나도 좀 봐 달라’며 손짓을 한다. 그들과 눈 맞추며 걷는 호숫길이 참 좋다. 비가 내리는 호수는 참으로 깊고 고요하다.

고모호수공원 내 김종삼 시인의 시비


ⓒ시민기자 변영숙

고모리 호수공원은 전적으로 소흘읍 주민의 노력이 만들어 낸 곳이다. 공원 입구와 호수 주변에 세워진 상징물에서 그 흔적이 오롯이 엿보인다.

주민들은 호수공원을 찾는 이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고모호수공원’ 상징물을 세우고 둘레길 곳곳을 정성이 담긴 조형물로 꾸몄다. 나뭇잎 모양은 500년 동안 온전한 자연의 모습으로 보존된 원시 자연림인 포천 국립수목원을 의미하고, 원형은 맑고 푸른 호수를 상징한다. 자기 고장의 자랑거리를 손님에게 내보이는 소흘읍 주민들만의 방식이다.


ⓒ시민기자 변영숙

공원 안에는 선사시대의 고인돌을 닮은 거대한 조형물이 놓여 있다. 바로 김종삼 시인의 시비인데 이 시비야말로 주민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곳에 없었을 것이다.

시비는 조각가 최옥영이 만들고, 서예가 박양재가 글씨를 썼다. 우리나라 시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비로 평가받는다. 시비의 윗돌에는 시인의 대표작인 <북치는 소년>이, 아랫돌에는 <민간인>이 새겨져 있다.

<민간인>

1947년 봄
심야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김종삼 시인을 모르는 사람도 이 시를 읽는 순간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칠흑 같은 어두운 바다 위, 혹여 발각될까 우린 어린아이의 숨통을 끊어야만 했던 그 참혹한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먹먹하다.


ⓒ시민기자 변영숙

주민들이 지켜낸 시비

김종삼 시인의 시비는 1993년 시인의 사후 9년 후에 그를 따르던 박중식 시인 등이 주축이 되어 39인의 동료 문인과 조각가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광릉수목원(현 국립수목원)에 근무하던 한 공무원의 주선으로 수목원 인근의 ‘가든 수목원 식당’ 정원에 세워져 18년을 한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나 국립수목원 측에서 주차장과 안내센터 조성을 위해 식당 부지를 사들임으로써 시비도 갈 곳을 잃게 되었다.


ⓒ시민기자 변영숙

한국시인협회는 시비를 파주 헤이리 문화마을로 옮기려고 하였으나 당시 주민자치위원회 이제승 위원장을 비롯한 주민들이 지역 유지들과 유족들을 설득하고, 포천시청에 이전 경비 지원을 요청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시비는 2011년 지금의 고모호수공원으로 이전할 수 있었다. 주민들이 시비를 지켜낸 것이다.

호수 둘레길 난간에는 김종삼 시인의 대표작을 적은 패널들이 걸려 있다. 시 한편 한편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 동안, 마치 호수 위에서 열리는 시화전에 와 있는 듯하다. 잔잔한 호수와 신록이 자연스럽게 시화전의 배경이 되어준다.

<묵화>

물먹은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시 구절 하나하나가 마음속으로 밀고 들어온다. 빗방울은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나무패널 아래 대롱대롱 달려 있다.


ⓒ시민기자 변영숙

시인은 깊은 절망과 슬픔, 처절함을 쓰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위로가 된다. 사람이라면 누구든 절망의 순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종삼 시인은 1921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나 평양 광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도요시마 상업학교를 졸업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1947년 월남하였다. 1953년 신세계에 ‘원정’을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과격한 줄임과 건너뜀이란 시의 본질을 꿰뚫는 방법으로 독특한 아름다움을 창조한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약 200편의 시를 남겼다. 1983년 대한민국 문학상을 받았다.


ⓒ시민기자 변영숙

시인의 짤막한 이력이다. 그는 떠나온 고향 땅에 대한 그리움과 삶의 고단함을 시를 부르며 견디다 간 외로운 시인이었다. 그런 그에게 고향은 닿을 수 없는 먼 곳일 뿐이었다. ‘나의 본적’이란 어쩌면 그런 자신의 처지를 노래한 시가 아닐까 한다. ‘몇 사람 밖에 안되는 고장 겨울이 온 작은 모퉁이’는 소흘읍 고모리가 아닌지.

<나의 본적>

나의 본적은 늦가을 햇볕 쪼이는 마른 잎이다.
밟으면 깨어지는 소리가 난다.
나의 본적은 거대한 계곡이다.
나무 잎새다.
나의 본적은 푸른 눈을 가진 한 여인의 영원히 맑은 거울이다.
나의 본적은 차원을 넘어다니지 못하는 독수리다.
나의 본적은
몇 사람 밖에 안 되는 고장
겨울이 온 교회당 한 모퉁이다.
나의 본적은 인류의 짚신이고 맨발이다.

그가 안식을 찾은 곳은 바로 ‘포천’이다. 시인과 포천의 인연은 없다. 그러나 그가 포천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포천의 부인터 공동묘지에 그의 부모님의 묘가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불쌍한 어머니’는 아들 넷을 낳고 모진 고생만 하다가 죽었다. ‘아우는 비명에 죽었고 형은 64세에 죽었다’ ‘불치의 지병으로 여러 번 중태에 빠지곤 했던’ 시인은 ‘속으로 치열하게 외친다’ ‘세상에 남길 만한 몇 줄의 글이라도 쓰고 죽는다고 그러나 아직 쓰지 못했다고.’


ⓒ시민기자 변영숙

시인에게 어머니는 삶에 대한 다짐이자 죽는 순간까지 놓을 수 없는 예술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나는 속으로 치열하게 외친다.
부인터 공동묘지를 향하여
어머니 아직 나는 살아있다고
불쌍한 어머니
나의 어머니

죽는 순간까지 울부짖으며 찾았던 어머니가 계신 포천이 시인에게는 그리도 그리워하던 고향이 아니었을까. 시인의 시비가 포천에 있게 된 것은 모두 이런 인연이 모여 만든 ‘필연’이 아닐까.


ⓒ시민기자 변영숙

김종삼 시인으로 이제 고모호수공원은 카페와 대형 빵 공장에 포위된 ‘그렇고 그런’ 호수가 아닌 ‘시가 있는 호수풍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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