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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3.1절 100주년 기념 포천의 독립만세 운동
2019-02-28 조회수 : 2987

1910년부터 35년간 이어진 일제식민통치
땅과 이름 자유를 빼앗긴 백성들
일제의 억압에 맞서 일어난 한민족

자막)
특별기획 3.1절 100주년 기념
포천의 독립만세 운동

자막)
3.1운동은 왜 일어났는가?

문화원장님 인터뷰)
1910년 일제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 당하면서
나라를 빼앗긴 백성들은 독립을 위해 만주, 블라디보스토크에
항일 독립기지를 건설하여 이주하였고,
국내에서는 을사5적을 비롯한 매국노 처단과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히 이루어 졌는데요

Na)
민족대표들은 고종의 독살설이 나도는 가운데 1919년 3월 3일,
고종 황제의 국장을 배웅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서울로 모일 것을 예견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거사일은 3월 1일 토요일로 결정되었다.

자막)
“매국5적(이완용,이근택,이지용,박제순,권중현)을 처형하고 10족을 도륙 하여도 분을 풀수가 없다”
면암 최익현

Na)
포천출신인 최익현은 의병운동의 중추적인 인물로서 을사조약 체결 이후 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을사5적의 죄상을 통렬히 규탄하여 고종에게는 을사조약의 폐기를
강력히 주청한 두차례의 상소와 낙안군수 임병찬등과 함께 전북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기병을 결의하고 각지방에 격문을 돌려 의병부대에 호응 할것을 호소 하였다
또한 일본 공사관에 서한을 보내 일본의 죄악상을 16개 조목을 들어 공격하였다

자막)
“일본의 곡식을 먹지않고 의연히 굶어 죽어 절개를 지킬것이다”

박동규 선생님 인터뷰)
면암 최익현 선생은 74세의 고령으로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모집,
‘의거소략을 배포한 뒤 순창에서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 하였으나 패전, 체포되어 쓰시마섬에 유폐 되었지요.
감옥에서 지급되는 음식은 일본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하고
단식을 계속하다가 쓰시마섬에서 옥사하신 순국선열이십니다.

Na)
이렇듯 포천은 한말의 대유학자인 김평묵과 최익현을 배출한 지역으로 사상적 영향이
일반 대중인들에게 널리 확산되면서 다른지역보다
유림적 전통이 강했고 의병전에 참여했던 유생들이 많았던
까닭에 항일운동도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자막)
“3월1일의 독립선언으로 조선인은 자주민이 되었다.”
근곡 박동완

박동완 손자 인터뷰)
근곡 박동완 선열은 구한말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 한국과 하와이에서 일생을 보내셨습니다
무궁화 근과 계곡 곡의 그의 아호 근곡은 대한민국 방방곡곡 무궁화가 피기를 소망한
노골적인 항일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Na)
학생과 시민들을 중심으로 파고다 공원에서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중심에는 민족대표 33인중 한명인 근곡 박동완 선생의 발자취가
주목받고 있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1919년 2월 조선기독교청년회 간사 박희도와 독립에 대해 논의하고 3·1운동 참여를 권유받아
이필주 및 손병희의 집에서 독립선언서와 청원서의 초고를 검토한 회의에 참석하여
역사적인 독립선언서의 초석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박동완 손자 인터뷰)
그는 천도교가 선도하고 기독교가 주도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중
한명이었으며 1920년대 말 신간회 창립 및 초창기 운영에 있어 중추적인 역활을 하셨습니다
전 생애에 걸쳐 독립운동가,기독언론인,교육목회자로 여러가지 사업을 동시에 감당하셨습니다

Na)
그는 3월 1일 태화관에서의 독립선언식에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 삼창을 외친 뒤,일행들과 함께 헌병대에 연행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고 출옥하였다

자막)
“의로운 청년이 되라.”

Na)
그 후 선생은 《기독신보》 주필과 조선중앙YMCA 위원 등을 맡아 활동을 재개하였고
신간회 간사로 민족협동전선의 기초를 세워 조국 없는 만주의 동포 권익 옹호에 참여 하였다
또한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의 목회자가 되어 교포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
개화사상을 계승한 지식인층의 언론을 통한 항일운동도 적극적으로 전개를 마련하였다

문화원장님 인터뷰)
포천의 3.1운동은 3월 13일 오전 11시 포천공립보통학교의 정수환을 비롯한 3·4학년 학생들이
일본인 교원의 눈을 피해 학교 뒷산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최초 시작되었습니다.
같은 시각 영중면에 위치한 영평공립보통학교에서도 시위운동이 기도되었고,
이후 독립만세 운동이 포천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지요.

Na)
1910년대 비밀결사운동,학교,서당에서의 민족교육운동이 활발히 전개
이는 근대화 교육학교 뿐만 아니라 유림적 전통이 강했던 포천지역의
서당의 유생들과 학생들이 선도적인 역활을 담당하였는데
1910년대 서당의 수는 82개에 학생수는 3.120명으로
유림적 전통은 적극적인 의병투쟁 및 3.1운동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신재현님 인터뷰)
포천군 내촌면 내리에서 출생하신 저희 신영희 선열께서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될때
양주지역에서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고초를 받은 동지들을 위해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셨습니다

Na)
신영희 선생은 3월16일 화도면 주민들과 마석루 병참 앞에서
궐기하여 시위군중들과 헌병주재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감행하였는데
일본헌병은 이에 발포를 하여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이 발포로 신영희 선생을 포함한 4명이 총탄에 맞아 3명은 현장에서
순국하셨고 그는 다음날 19일에 순국하였다

박동규 선생님 인터뷰)-송우리 현장
첫 민중적 만세 시위는 3월 24일 영중면 영평리와 소흘면 송우리에서 일어났어요.
영평리에서는 1천여 명의 주민이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했으며, 군청 사무소를 습격하여
친일 면장을 응징하고 영평 헌병 분견소를 공격하였지요.
송우리에서는 주민 600명이 시위운동을 전개 했는데요
송우리 헌병분견소 헌병들의 총검에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었습니다.

Na)
또한 100년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약탈로 인하여 일본인 이주자가 증가하였고
대다수 포천농민들은 점차 토지를 잃고 몰락하며
일본인들에게 고율의 소작료 등을 착취 당하였다
따라서 우리농민들의 반일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어 항일투쟁에 대한 도화선이 당겨진 것이다

3월30일에는 3.1운동 기간동안 포천에서 가장 큰 규모의 격렬한 시위가 전개 되었는데
신북,일동,이동,영중면 농민과 주민 2000명이 신북면사무소 앞에 모여 집회를 갖고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게 되었다
농사를 짓던 유중식과 김수종,양문리의 함병현 등은 만세 삼창과 태극기를 앞세우며
포천읍으로 행진하였고 가채리 앞 벌판에서 일본헌병과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무자비한 총격이 가해지고 이에 맞서 투석전으로 맞대응을 하며
격렬히 항쟁 하였으나 결국 탄압으로 해산되었다

문화원장님 인터뷰)
시위주동자, 서당훈장인 이영여 선생은 현장에서 총탄으로 비명으로 돌아가시고
조훈식,조계식,최학돌 선생들은 체포 되었지요. 유중식,함병현 선생등은 밀고에 의해 잡혀갔습니다.

Na)
이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날 송우리에서도 소흘읍 주민,가산면 주민 2.000여명이 합세하여 송우리 헌병주재소를
공격하는 등 24일 송우리 만세운동, 29일 무봉리 만세운동 시위에 잡혀간
동지들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적인 양상을 띄게 된다

문화원장님 인터뷰)
시위를 주도한 가산면 총책임자 최석휴 선생은 일본헌병의 총탄에 현장에서 순국하셨지요
시위가 얼마나 격렬 했으면 송우리 헌병 주재소에서 인근 헌병분견대에 지원을 받을 정도로
엄청 났었습니다

Na)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속에서도 포천 3.1운동은 계속 번져 나갔다
4월1일에는 일동면 기산리 주민200명이 만세시위를 벌였고 4월3일에는
일동면 장암리 주민500여명과 노곡리 주민 400여명이 각각 시위를 전개하였고
신북면 삼정리에서도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박동규 선생님 인터뷰)
기록에서는 4월4일을 마지막으로 3.1운동이 끝이 납니다
비록 짧은기간동안 전개 되었지만 줄곧 처절하고 적극적인 양상을 띄게 된건
그만큼 포천지역의 항일의식이 투철 했기 때문이지요
의병항쟁의 대표적인 인물인 최익현 선생을 배출 하였을 뿐 아니라
한말부터 이은찬,연기우,강기동,윤인순 의병부대의 항쟁지로 많은 사람들이 의병에 가담 했었고
이 의병투쟁전통이 3.1운동에 그대로 표출 되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Na)
왜적의 머리를 베어 오는자 2만냥
군기,탄약을 가지고 오는자 1만냥
이 강토는 너희가 출생하고 조상이 묻힌 땅이다
정의를 배반하여 왜적의 노예가 되면 일진회의 무리와 다를바가 무엇인가 말인가
즉시 우리군진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바이다
-포천,양주 의병장 윤인순

나는 대소 40여차례 싸움에서 일본군 470여명을 참살 했으니 네놈들은 나를 빨리죽임이 옳다
내가 곧 죽어서 하늘에 돌아가면 오직 영혼 만이라도 우리 국민을 도울 뿐이다
- 포천,양주 의병장 이은찬

신재현님 인터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일제의 모진 고문과 핍박을 받으면서 오로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하여
순국하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의연한 정신을 잊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Na)
3·1운동은 1919년 기미년 그날 있었던 일만은 아닙니다.
일제 강점기 내내 독립을 염원하며 목숨을 아끼지 않은 선열들의 희생을 통해
민주주의와 평화와 비폭력의 정신이 빛난 독립운동입니다

청년들의 이 뜨거운 절규가 오늘날의 우리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3·1운동 100년, 대한민국 100년, 그리고 포천 100년
우리 대한민국의 3.1운동을 기억해주세요
그리고 포천 독립운동가를 기억해주세요
3·1운동은 대한민국의 시작이자 첫 줄입니다.
OPEN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제4유형: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본 공공저작물은 “공공누리” 제 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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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된 의견글 1
  • 박귀영 2019-03-01 삭제
    기록하여 기억하라~ 기획특집편 편집에 박수를보냅니다. 포천시 타향서 늘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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