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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관과 낙관 사이
2017-07-10 조회수 : 3429

“……또 다시, 좋은 세상이 오고 있다고 풍문은 전하고 있다. 과연 좋은 세상이 올 것인가? 그것은 헛된 바람이 아닐까? 나는 주저하며 세계를 분석하고 해석한다. 그것이 나에게 맡겨진 일이니까. 아니 차라리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러나 눈은 침침하고 손은 더디다.”

6월 항쟁의 감격과 열기가 점차 바래지던 어느 봄날에, 평론가 故 김현은 이런 일기를 남겼다. 황혼이 저문 뒤에야 비로소 날개를 펴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시대의 부조리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한차례 격변의 물결이 휩쓸고 간 자리에서 이러쿵저러쿵 뒷공론을 일삼는 게 먹물들의 원죄이자 숙명인지 모른다.

한때는 나도 역사의 진보를 어설프게 낙관하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덧 반백의 나이를 훌쩍 넘기고 보니 그런 믿음은 사라졌다. 허무주의와 같은 정치적 니힐리즘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역사는 반복된다는 케케묵은 순환사관에 마음이 끌린다. 고금의 역사를 접하면서 때때로 느끼는 기시감(旣視感)은 나만의 착오일까? 여기서 잠시 간단한 퀴즈를 내겠다. 역사적 인물을 찾는 문제이다. 지레 긴장 마시라. 평소 시대물과 사극에 관심 있는 중학생 정도면 넉넉히 맞출 만한 수준이니까.


ⓒ포천시

첫 번째 문제. 난세에 유력 군벌의 아들로 태어났다. 주저하는 아비를 부추겨 대권의 야망에 불씨를 댕긴 뒤, 궂고 험한 일을 앞장서 처리했다. 신왕조를 세우고 나서 막상 후계구도에서 밀리자, 죽 쒀서 개 줄 수 없다며 결연히 궐기. 형제의 피를 손에 묻히고 아비를 압박해 억지로 즉위의 길을 닦았다. 이런 업보 탓인지 후계자로 세운 방탕한 맏아들을 끝내 폐위하는 불행도 겪지만, 아무려나 신생국가의 기틀을 다진 군주라는 후대의 평가를 받는다. 누구일까?

두 번째 문제. 정치의 부패와 민심의 이반으로 난장판이 된 세상을 혈혈단신 떠돌며 온갖 고생을 섭렵했다. 한때는 절에 들어가 탁발승으로 연명하기도 한다. 도적떼(봉기군)에 가담한 뒤 두각을 나타내 무리의 이인자로 올라서고, 머잖아 독립해서 자신의 세력을 키운다. 마침내 새 나라를 열고 등극하지만, 비천했던 과거의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이상심리를 떨치지 못한다. 불신과 의심으로 측근들을 잔인하고 냉혹하게 숙청하다가 결국 고립되어 쓸쓸한 최후를 맞이하는 인물. 흔히 영웅과 악당의 양면을 지녔다고 여겨진다. 누구일까?

세 번째 문제. 소싯적부터 전장을 누비며 잔뼈가 굵었다. 차곡차곡 쌓은 전공으로 왕조의 버팀목으로서 입지를 다진다. 절박한 위기를 맞아, 군주에 대한 불안감과 의구심을 품은 부하 장수들의 추대로 ‘마지못해’ 왕좌를 차지한다. 주인의 뒤통수를 친 명백한 쿠데타였지만, 상황의 불가피성을 내세워 자신의 야망을 은폐한 이미지 메이킹의 대가. 덕분에, 오랜 분열과 혼란을 매듭짓고 통일의 시대를 연 창업주이자 전란에 지친 백성을 다독이고 쉬게 한 애민의 정치가로서 넘치는 칭송을 받았다. 누구일까?

ⓒ포천시

너무 쉽다고? 미소 짓는 표정이 보일 듯하다. 당신은 자신 있게 답하리라. 첫 번째, 태종 이방원. 두 번째, 궁예. 세 번째, 왕건. 그런데, 미안하지만 모두 빗나갔다. 당신이 국사의 테두리 안에서만 맴도는 오류를 범한 탓. 내가 의도한 정답은 이렇다. 첫 번째, 당 태종 이세민. 두 번째, 명 태조 주원장, 세 번째, 송 태조 조광윤. 애당초 오답이 불가피한 ‘이현령비현령’이라고? 진정하시길. 그래서 서두에 ‘기시감’을 언급한 까닭이다.

근래 우리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변화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그 앞에서 기대와 불안이 엇갈리는 건 당연한 반응이리라. 그러나 지나친 낙관도, 대책 없는 비관도 모두 위험하기는 매한가지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어차피 역사란 인간이 걸어온 삶의 궤적이 아닌가. 찬찬히 둘러보면 거울삼을 만한 사례는 도처에 널렸다. 과거에서 배우지 못하면 실패는 반복되기 마련이다.

시민기자 한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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