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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노새 탓
2019-01-29 조회수 : 3350

별것도 아닌, 부부싸움의 시말을 따져보면 늘 그놈의 알량한 권위 의식이 탈이다. 성급한 일반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단언컨대 이 땅의 수컷 대부분이 결코 아내에게 지고는 못 산다는 강박증에 시달린다. 코스프레가 익숙해지면 자신도 헷갈리기 마련. 주제 파악이 생각만큼 쉽지가 않으니까. 건성이나마 왼쪽을 힐끔대며 진보 흉내를 내다보니 오랫동안 마초의 본색을 망각한 채 살았다.


ⓒ포천시

평소 버릇처럼 애용하는 레토릭 중에 “X값도 못 하는 노새”가 있다. 놀라지 마시라. 노새의 치명적 약점을 대여섯 살 무렵에 벌써 눈치챘으니까. 남달리 조숙하거나 영악했던 때문이 아니다. 나와는 십 년 가까운 터울이 지는 누이가 당시에 중학생이었는데, 교재 중에 <생물도감>이란 게 있었다. 정규 교과서는 아니고 <지리부도>와 비슷한 유형의 참고용 부교재였던 듯. 아무튼 고급스러운 지질의 꽤 두터운 양장본이었다. 육해공에 서식하는 동식물을 두루 망라해서 일일이 원색의 세밀화를 싣고 간단한 설명을 달았는데, 60년대 말엽의 열악한 출판여건을 고려하면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호화로운 꾸밈새였다. 변변한 놀이 친구도 없이 볼거리에 굶주렸던 외톨이로선 그야말로 노다지를 찾은 기분이었던 바, 공자의 위편삼절(韋編三絶)이 무색하게 책장이 너덜거리도록 끼고 살았다. 아직 한글도 깨치기 전이라, 그림을 먼저 익히고 이름과 설명은 나중에 어머니나 누이들의 도움을 빌려 습득했다. 그렇게 축적한 정보의 바탕에서 문제가 된 노새의 이미지가 싹튼 것.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가치 높은 말인 더러브렛을 필두로 늠름하고 아름다운 여러 품종의 말이 도열한 페이지 끄트머리에, 왠지 초라하고 주눅 든 인상의 두 마리 짐승이 보였다. 말보다 상대적으로 큰 귀와 작은 몸통을 지닌 당나귀와 노새였다. 특히 노새의 경우 한심한 건 외모뿐이 아니었으니, 암말과 수탕나귀 간의 ‘신분’을 초월한 사랑의 씨앗인데 글쎄 생식능력이 없단 거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어머니께 물었더니 “응, 새끼를 못 낳는단 뜻이야.”라는 답변. 순간 프로이트도 융도 알 턱이 없건만, 어린 소견에 제법 ‘정신분석학’적 패러다임을 작동했음이 분명하다. 암말과 수탕나귀의 결합을 사람에 견주어, 남녀양성의 지위가 역전된 비정상적 형태로 받아들였으니까. 비록 성 지식은 전무할망정, 유년의 내면에서 막연하게나마 똬리를 틀기 시작한 편견을 꼰대의 말투로 옮긴다면 이쯤 될 듯.

“그간 ‘학습’한 바에 따르면, 동물은 대개 암컷보다 수컷이 훨씬 크고 강하더라. 따라서 수컷이 암컷에게 주도권을 행사해야 옳다. 그런데 ‘늠름한’ 암말(어미)과 ‘초라한’ 수탕나귀(아비)의 관계는 하늘이 부여한 이런 질서의 왜곡이다. 부권(수탕나귀)이 실추된 콩가루 집안에서 억압을 체험한 자식이 제구실 못 하는 병신(노새)으로 자라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결과일 뿐…….”

이건 뭐 더도 덜도 아닌 전형적 마초의 발상일 터. 도대체 어떤 계기로 이런 사고가 배태된 걸까.

 ⓒ포천시

사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고추’를 달고 나온 덕분에 줄줄이 사탕 같은 손녀들에게 질렸던 할머니로부터 노골적인 편애와 과보호를 받으며 자랐다. 할머니의 눈치를 살피느라 누이들은 사뭇 긴장을 늦출 수 없었는데, 예를 들면 아무 데나 누워 선잠이 든 나를 무심코 넘어 다니기라도 했다간 당장 할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이런 환경에서 자연스레 남존여비의 신념을 체화시킨 게 오로지 내 탓만은 아닐 성싶다.

그런 내가 할머니의 울타리를 벗어나 낯선 세계로 진입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 당시의 꼬맹이들은 요즘과 비교가 안 되게 어수룩했으니, 아무리 시골이라지만 제 이름조차 쓸 줄 모르는 놈이 태반이었다. 일주일쯤 운동장에 줄지어 모여 ‘둥근 해가 떴습니다’ 따위의 동요와 율동만 따라 하다가 드디어 교실 수업이 시작됐는데, 이런 장바닥이 따로 없었다. 대견한 ‘내 새끼’가 글 배우는 모습을 지켜보고픈 학부모들 때문에 가뜩이나 비좁은 교실이 터질 듯 혼잡했던 까닭. 그런 와중에 담임이 노래자랑을 제안했다. 어차피 공부할 분위기가 못 됐으니까. 계집애 하나가 냉큼 나서더니 앙증맞게 ‘소녀의 꿈’인가를 불러제꼈다. 그러자 담임이, 여자가 먼저 불렀으니 이번엔 남자 차례라면서 엉뚱하게 성 대결로 몰아가는 거였다. 한참 뜸을 들여도 ‘지원자’가 없자, 은근히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럼 여자 편이 이긴 거예요!” 그 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앞으로 걸어 나간 것. 평소 유난히 숫기가 없고 낯가림이 심하던 성격을 고려하면 전혀 예상 못 했던 일. 어머니조차 화장실이 급한 줄로 아셨다니까.
 
막상 교단 위에 서고 보니 눈앞이 캄캄했다. 딱히 아는 노래가 없었던 것. 어쩌겠나, 홍당무처럼 상기된 채 고작 ‘산토끼’를 부르고 들어왔다. 후회막급이었다. “남자가 잘했어요, 여자가 잘했어요?”라는 담임의 물음에, 동류의식을 발휘한 사내 녀석들이 목청껏 “남자요!”하고 악을 써댔지만 좀처럼 민망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게 초중고 시절은 물론, 대학을 거쳐 군대를 마치기까지 통틀어 내가 자발적으로 남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던 유일한 경험이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하던가.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어도, 나는 여전히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팔등신의 글래머보다 가냘픈 몸피의 여성에게 끌리는 개인적 취향도 뿌리를 캐면 거기에 닿아 있을 터. 일종의 각인효과랄까. 유감이지만 그 시절 내가 가졌던  ‘생물도감’엔 노새의 대립 쌍이라 할 ‘버새’가 실리지 않았으니. 수말과 암탕나귀가 낳은 버새란 짐승 또한 노새와 마찬가지로 생식능력이 없단 사실을 조금 일찍 알았더라면 내 삶의 태도가 어떻게 변했으려나…….

시민기자 한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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