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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으로 갈라진 역사의 현장 영중면 양문리
2014-06-02 조회수 : 4315
그리 큰 인기가 있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소련과 미국군에 의해 식구들이 생이별을 하게 되자 몰래 땅굴을 파서 만남을 지속한다는 내용의 '만남의 광장' 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이런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난 곳이 바로 우리 포천에 있다. 영중면 양문리이다. 포천은 분단의 상징인 위도 38도선이 거의 중간을 가르며 지나간 곳이다. 비슷한 위치에 있는 양구나 춘천도 이 38선에 대한 역사적인 재조명 작업을 하고 있다. 포천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양문리는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한 마을 가운데로 38선이 지나간 곳으로 구 영중면 사무소와 새로 지은 영중면 사무소 중간 지점으로 38선이 통과하였다.
 
ⓒ포천시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어느 날 갑자기 미군과 소련군이 치는 철조망을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철조망이 처음에는 삶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내 이선은 분단의 상징이 되었고 이들은 서로 만나기 위해 철조망을 피해 먼 풍혈산 쪽으로 밤에 몰래 넘어가 가족을 만나곤 했다고 한다.(경인일보 2012.03.07자 [길에서 뿌리를 찾다·6]참조) 특히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에 미군 초소가 있었다는 구 영중면 사무소와 소련군 초소가 있었다는 신 영중면 사무소 부근 축대 사이는 주민들의 왕래가 잦았던 마을길이었다는 것이다.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북한군은 바로 이 양문 지역을 주 돌파지역으로 삼고 남침을 했다고 하는데 이는 43번 국도를 이용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포천시

양문에 살던 주민들은 6.25 전쟁이 발발하기 하루 전날 유난히 많은 북한군이 지금의 양문2리에 있는 넓은 들이라 불리는 분지에 모이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오토바이와 트럭, 탱크 등이 동원된 대규모 병력이 집결한 곳으로 이들은 6월 25일 새벽을 기해 38선을 돌파하여 남침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들은 신북면 기지리에 있는 벙커 지역까지는 큰 저항도 받지 않고 남하하였을 것이라 추정된다. 그렇게 이곳은 한국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분단의 상징으로써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다. 그러나 38선이 있었다고 하는 지점에서 지금의 전쟁기념탑 부근으로 옮겨진 표지석을 빼면 이곳을 알릴 수 있는 어떤 표식이나 알림판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역사적인 중요성을 생각할 때 이곳에는 소련군 초소와 미군초소의 위치, 38선의 위치 등을 알릴 수 있는 표지나 알림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당시를 기억하는 노인들이 사라지기 전에 고증작업과 정보수집작업도 있어야 할 것이다. 이곳은 한반도의 분단을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지점으로서 역사적인 재조명을 받아야 할 것이다.
 
무궁무진포천 소식지 편집위원 이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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