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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귀한 왕실의 태(胎), 포천의 태봉(胎封)을 가다.
2022-03-30 조회수 : 3067

시민기자 유재술

 

아기가 엄마의 뱃속에서 엄마와 호흡하며 교감하는 시간은 보통 열 달 남짓이다. 이때 아기는 엄마의 자궁 안에서 이미 만들어진 태반으로부터 영양소를 얻게 되는데, 자라면서 탯줄을 통해서 태아로서의 삶을 살다가 열 달이 지남과 동시에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이 얼마나 세상과의 소중한 만남이던가.

그 소중한 생명의 매개였던 탯줄과 태반을 민가에서는 마당 한쪽에 땅을 파서 묻거나 불에 태워 없앤다거나 또는 물에 띄워 보내든지, 그도 아니면 말려서 보관하는 등 여러 관례가 있었다. 그러나 일반 백성과 다르게 왕가에서는 더 존귀하게 취급되어 별도의 방식에 따라 땅에 묻었는데,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우리 포천시에는 총 7기의 태실 중 고려 왕실의 송우리 태봉을 제외한 6기의 태실이 무봉리, 만세교리, 주원리, 가채리, 금주리, 성동리 등에 존재하나 원형의 유지 여부는 고사하고 일부는 위치마저도 혼미하다.

ⓒ시민기자 유재술

송우리 태봉에 가는 방법은 비교적 간단하다. 버스를 타고 송우리 버스터미널 앞에서 내려 개나리 아파트를 향해 올라간다. 아파트 관리사무소를 따라 올라가다가 반쯤 열린 문을 통해 산을 조금만 오르면 된다. 포장도로는 이내 오솔길로 바뀌는데 바로 시원한 숲이 나타난다.

ⓒ시민기자 유재술

왕실에서 산후 태아의 태(胎)와 태반(胎盤)을 모시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문헌에 의하면 신라 김유신의 태실이 최초로 등장하는데, 김유신을 낳고 그의 어머니가 태와 태반을 충북 진천의 높은 산에 묻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어 이미 태를 묻는 장태(藏胎)의 문화가 그 이전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지금도 김유신의 태실은 진천군에 현존하고 있다.

ⓒ시민기자 유재술

​오솔길이 끝나는 지점에 이런 시멘트 구조물의 계단을 만나면 어느새 정상이 보인다. 높이 175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라 운동하는 셈 치고 가볍게 오를 수 있는 험하지 않은 경사이다.

​인상적인 바위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 한글로 써 놓은 글씨가 보이는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 새겨 넣었고, 평평한 바닥에는 장 씨 성을 가진 사람의 이름이 여럿 보인다. 부디 장난질로 써 놓은 낙서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다.

ⓒ시민기자 유재술

고려시대에는 총 32기의 태실이 기록에 나타나는데, 그러나 고려의 태실문화는 제도화되기는 하였으나 체계적으로 확립되지 않아 성행하지는 못했으며 왕과 제위를 이을 세자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것은 인종의 태실뿐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풍수지리학의 확립과 함께 전국에 146기의 태실이 기록되고 있으며 이중 상당수 약 54기는 파주 서삼릉에 모셔져 있는 바, 그 이유는 참으로 기막히고도 서글프나 글의 말미에 이를 기술하고자 한다.

버스에서 내려 채 십분도 걸리지 않아 태봉의 정상에 이르렀다.

ⓒ시민기자 유재술

조선왕조는 창업초기부터 태실에 관심이 지대하여 태실도감을 설치하고 대신으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였으며 임명된 대신이 전국의 명산을 찾아 풍수지리에 입각한 명당의 현황을 보고하게 하여 왕이 직접 선정하는 절차를 거쳐 정했다. 태실의 주인이 되는 대상도 왕과 세자의 범위를 넘어 대군이나 군 또는 공주나 옹주까지도 그 대상으로 확대되었다.

​과연 온전한 모습일까.

ⓒ시민기자 유재술

태실로 정해지는 지형은 풍수지리상 반드시 높은 산일 필요는 없으며, 용이 산을 타고 내려오는 내룡맥(來龍脈)이 잘 형성된 돌혈(突穴), 즉 산맥을 타고 내려오던 산줄기가 꺼졌다가 다시 치솟아 마치 가마솥을 얹어 놓은 모습이거나 또는 물 위에 거북이가 떠 있는 형상을 으뜸으로 한다. 그래서 멀리서 보았을 때 평지를 바라보며 양쪽으로 좌청룡 우백호로 둘러싸여 포근하게 느껴지는 자리이다. 창수면 주원리의 태실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도 아니면 평지에 홀로 우뚝 솟은 경우도 길지로 보는데, 송우리의 태실이 바로 이 경우이다.

태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중전이나 후궁이 왕의 아이를 잉태하여 출산이 가까워지게 되면 산실청이 차려지고 이어 아이를 낳으면 태(胎)와 태반(胎盤)을 산실 내에 길(吉)한 방향으로 두었다가 태를 씻게 되는 날엔 역시 길한 방향에서 길어온 물로 태를 백 번을 씻는다. 이어 특별한 누룩으로 빚어 독특한 향을 내는 술인 향온주(香醞酒)로 다시 정성스럽게 씻고 항아리를 준비하여 그 안에 동전 한 닢을 놓은 후 태를 올려놓는다. 기름종이와 남색 비단으로 항아리 입구를 덮어 붉은 색 끈으로 묶어 봉한 다음 항아리 뚜껑을 덮은 다음 다시 붉은색 끈으로 네 귀를 묶는다. 그런 다음 항아리를 좀 더 큰 항아리에 넣고 틈을 종이와 솜으로 메운 다음 종이로 입구를 덮고 엿(甘湯)으로 밀봉한다. 바깥 항아리를 다시 네 귀의 고리에 붉은색 끈으로 뚜껑을 같이 묶는다. 다음은 종이에 태어난 태의 주인의 사주와 이를 담당한 신하의 이름을 적어 고리 사이에 끼워 넣는다. 태함(胎函)의 실명제이다. 다시 보다 더 큰 항아리를 준비하여 그 속에 넣어 뚜껑을 덮고 역시 네 귀를 붉은색 끈으로 묶은 뒤 근봉(謹封)이라 쓴 종이를 끼운 후 산실로 들여온다.

관상감의 건의에 따라 왕은 태를 안치할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태를 묻을 장소에서는 터를 닦고 제를 올린다. 검은 옷을 입은 신하가 태를 노루 가죽과 붉은 천으로 감싼 후 이를 함에 넣고 다시 이 함(函)을 작은 가마에 실어서 궁궐을 나선다. 이 일을 맡은 안태사(安胎使)는 태함을 태봉으로 인도하며 태봉에 이르면 태 항아리와 태지석을 돌로 만든 석함에 넣고 뚜껑을 닫고 안태(安胎)한다. 이어 태실비를 세우고 토지신에게 제를 올리고 나서 태실이 완성되면 사방에 금표를 세워 잡인의 접근을 막는다.

그러나 이 태실의 주인이 왕이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기존의 태실에 더하여 격을 높여 석조물을 추가하는데, 이를 가봉(加封)이라 한다. 왕의 등극으로 가봉이 결정되면 관상감은 날짜와 시간을 정해 예조에 통보하고, 태실이 있는 곳에서는 터를 닦기 전 제를 올려 토지의 신에게 고하고 추가할 석물 등을 준비한다. 팔도 각 지역에서 올라온 석물들을 조립하여 가봉을 마치면 이를 증표하는 가봉비를 세우며 이렇게 해서 가봉태실, 줄여서 태봉(胎封)이 완성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태실은 온전한 모습이 아니다.

ⓒ시민기자 유재술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송우리 태실은 고려시대 태조 왕건의 왕자로 추정되는 태봉이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태조 왕건의 정희왕녀라는 설이 있으나, 그 또한 정확하지 않은 이유는 이미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의 문화재 조사라는 명목으로 태항 등의 모든 구성물을 도굴해 가서 대석(바닥을 받치는 돌)과 개석(석실을 덮는 돌)만이 남아 있는 탓이다.

ⓒ시민기자 유재술

그러나 태항아리를 덮는 개석 또한 근래 해당 행정기관이 복원한 것일 뿐 보존되어온 원형은 아니다. 태실의 주인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태항아리에 있는데 강탈을 당했으니 알아낼 방법이 없는 것으로 본다. 포천에 있는 7기의 태실 중 태항아리가 보관되고 있는 태실은 단 한곳도 없다. 그나마 원형을 제대로 유지하고 있는 곳 또한 단 한곳도 없고 일제강점기 모두 훼손되어 어느 태실은 이름만 존재하는 곳도 있다.

소흘읍 송우리 외에 6곳의 태실 현황을 좀 보자.

무봉2리 마을회관 앞에 있는 8번째 왕녀의 태실로 알려져 있다. 본래 절골 부근 태봉산에 있었으나 일제시대 훼손된 것을 그나마 주민들이 지게 짐으로 져서 이곳으로 옮겨와 기념하고 있다 한다.

ⓒ시민기자 유재술

[소흘읍 무봉리 마을회관 앞]

만세교리 태봉은 그나마 원래 모셔져 있던 제자리에 원형을 조금은 유지하고 있으며, 비문이 가장 확실하게 남아있어 태실이 만들어진 때 주인이 명확하다. 영조가 가장 사랑해 마지않던 화완옹주의 태실이나 역시 일제강점기 훼손되어 태항아리의 개석과 비석만 남아 있다.

ⓒ시민기자 유재술

[신북면 만세교리 산 13-2 태봉산 기슭]

성동리 38선 부근 본래의 위치가 아닌 대로변에 옮겨져 있다. 후일 익종으로 추존된 헌종의 아버지 효명세자의 태실이나 여러가지 관련된 유물들이 모여져 있다.

ⓒ시민기자 유재술

[영중면 성동리 640-1]

영평천을 건너 진군교에서 바라보는 주원리 태봉의 모습이다. 높은 산을 타고 내려오다 형성된 돌혈의 전형적인 자리에 위치하며, 조망이 훌룽하여 벙터나 교통호같은 군사시설들이 혼재하며, 태항아리를 받쳤던 태대만 남아있다.

ⓒ시민기자 유재술

[창수면 주원5리(군자동) 산248]

평지에서 홀로 솟아오른 돌출형 태실이 지어져 있었으나 그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으나 구전에 의하면 태항아리는 대일항쟁기에 일본사람들이 다 도굴해 갔고, 태실 등은 일부가 성동리 태실유적군에 옮겨져 있다고 한다.

ⓒ시민기자 유재술

[영중면 금주리 480]

최익현 선생의 사당이 있는 가채리 청성사 부근에 위치하나 역시 관련된 유적은 남아있는 것이 없으며, 풍수지리상 내룡맥 돌혈의 자리이다.

ⓒ시민기자 유재술

[신북면 가채리 714]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전국의 천하 명당자리에 있어야 할 태실은 거의 절반 가까이 지금의 서삼릉에 모셔져 있는데 일제가 우리의 민족정기를 말살하고자 파헤쳐서 고급스럽고 귀해 보이는 국보급 태항아리는 모조리 강탈해 가고 별 신통치 않은 것만 옮겨와, 그것도 공동묘지의 비석처럼 해 놓았는데 그나마도 일본의 일(日) 자를 상징하여 마치 일본신사에 참배하는 모양을 취해 놓았다는 것이다. 저지른 죄가 두려웠을까, 비석의 뒷면에 새겨진 자신들의 연호는 쏙 지워버렸다. 답답하고도 갑갑한 노릇이다. 이 어찌 기막히고도 서글픈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참고자료 : 국립고궁박물관. 1997년 발행 포천군지. 경기문화재연구원 2021년 12월 발행 경기도 태봉태실 조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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