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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맛
2011-10-05 조회수 : 5310

가을을 전어의 계절이라 한다. 살이 통통 오른 전어를 불에 구우면 그 맛이 대단하여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단다. 경기도 포천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나는, 불행이도, 그 맛을 모른다. 사람들을 따라 전어구이도 먹어보고, 회도 먹어봤지만, 과연 이 맛에 상심한 며느리가 돌아올까 싶다. 전어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내게, 다행이도, 가을의 맛이 있으니 바로 밤, 대추, 땅콩이다.

농촌의 가을은 뭐니 뭐니 해도 쌀이다. 뜨거운 여름을 지나면 황금색으로 변해있는 마법 같은 들판을 보면 과연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논두렁을 지나면 코를 간질이는 향은 구수하며, 파란 하늘 아리 울려 퍼지는 겸손한 벼들의 노랫소리는 그 어떤 오케스트라 보다 듣기 좋다. 또 가을 들판에 서서 흐뭇하게 미소를 짓는 농부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하지만 철없는 자식은 아버지의 마음과는 조금 달랐다. 추수의 기쁨과 한 해 먹고 사는 걱정을 모르는 자식은 눈에 들어오는 황금벌판 보다 입에 들어오는 달콤, 고소한 먹을거리가 더 좋았다. 지금처럼 먹을 것이 풍부하지 않던 시절, 아이들은 무언가 먹을 게 눈에 띄면 보이는 족족 입으로 넣었다. 봄에는 오디, 초여름에는 앵두, 그리고 가을이면 밤, 대추, 땅콩이었는데, 풍성하기로 따지자면 단연 가을이 최고였다.


ⓒ시민기자 안효원

‘공부 열심히 해야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학업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학교 가는 길 밤나무를 그냥 지나치기는 쉽지 않았다. 밤나무를 지날 다가 밤이 하나 눈에 띄면 가방을 내팽겨 치고 밤 줍기에 열을 올렸다. 친구 녀석이 나 보다 더 많이 주울까 하나둘 줍다 보면 주머니는 어느덧 밤으로 가득 찼다. 학교에 지각을 해 선생님께 혼이 나도, 주머니의 밤을 까먹을 생각을 하면 크크 웃음이 났다.

대추는 어떤가. 아직 갈색으로 다 변하지 않은 것이라도 맛은 일품이었다. 달콤하고 상큼한 것이 입 안 가득 행복으로 전해졌다. 밤을 먹자면 밤송이 가시에 찔리기도 하고, 속껍질의 쓴 맛을 봐야 비로소 노란 속살을 만날 수 있는 반면에 대추는 스윽 한 번 문지르고 입 안에 넣으면 그만이다. 아이들은 대추나무 아래서 쉽게 떠나지 못하고, 자신들의 작은 키를 원망했다. 아직 덜 익은 혹은 저 높은 곳에 있는 대추를 어떻게 따서 먹을 수 있을까 고심하다 잠에 들기도 했다.

밤과 대추에 비해 땅콩은 밭에 심는 작물이기에 먹기가 수월치는 않았다. 주인의 눈치를 봐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몸을 최대한 수그리면 어른들의 눈에 띄지 않을 것이란 믿음 속에 아이들은 서리를 감행했다. 일단 땅콩 한 포기를 뽑고, 그 자리를 흙으로 덮은 후 재빠르게 도망을 쳤다. 그리고 찾아오는 행복한 시간, 땅콩은 볶아 먹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약간 비릿하고 고소한 것이 날 것으로 먹는 것이 제 맛이다. 껍데기에 뭍은 흙이 입으로 들어가기도 했지만, 아이들은 웃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땅콩 밭주인들이 아이들이 저지른 귀여운 도둑질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범인을 찾아 혼을 낸 적은 없다. 내 집 아이가 먹었거나, 이웃 집 아이가 먹은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시시비비를 가릴 이유가 없던 것이다. 그저 건강하게 자라나는 아이들의 입에 들어가는 게 흐뭇할 뿐. 그렇게 생각해 보면 아이들이 먹고 자란 것은 비단 밤과 대추, 땅콩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사랑을 먹고 자랐다. 올해도 밤과 대추, 땅콩을 먹으며 가을 농촌의 풍성함과 수십 년 전 시골의 푸근한 인심을 생각해 본다.

시민기자 안효원(mmb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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