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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듣는 진경산수화의 대가 소정 변관식
2021-08-03 조회수 : 4219
시민기자 유예숙


변관식은 1899년 황해도 옹진 출생으로 외조부인 조석진을 따라 송동 지금의 혜화동의 외가로 상경하여 성장하였다. 소정은 화가로서의 재능 영향은 조선 말기 화가였던 외조부 조석진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외증조부 또한 유명한 화가였다고 한다.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변관식은 1916경 서화 미술회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하며 조석진, 안중식으로부터 화풍을 전수받게 된다. 소정은 외조부 소림과 친조부 춘정에서 한자씩 따서 ‘소정‘이란 호를 따 사용했다고 한다.

▲소정 변관식의 모습ⓒ시민기자 유예숙

소정은 1921년 제1회 서화 협회전에 출품하면서 화단에 등단하며 이듬해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가 창설되자 출품하여 4년 연속 입상하며 화가로서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23년에는 전통회화와 새로운 회화를 연구하기 위해 이상범, 노수현, 이용우화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전통화 그룹 ‘동연사’를 조직하기도 했다.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작 그림ⓒ시민기자 유예숙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연속 입상한 변관식은 1925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의 심사 위원이었던 남화의 대가 고무로 스이운과 인연이 닿아 일본유학길에 오른다. 또한 이용문의 후원을 받아 동경 우에노 미술학교 청강생으로 유학하며 일본의 신 남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러나 정작 일본에서 배우고 익힌 것으로는 작품을 내지 않았으며 자기만의 독자적인 동양화의 준법으로 여러 번 겹치어 톤을 내는 방법인 파묵법으로 그렸다고 한다. 1925년 일본에서 시작한 유학 생활은 1929년에 마치고 귀국하여 광주에서 4년 거주하였다고 한다. 첫 개인전은 40여 점의 작품으로 개성에서 가졌으며, 1936년 2월 조선미술원에서 동양화를 가르치기도 했으며 10월에는 한동안 출품하지 않던 제15회 서화 협회전에 장수산 병풍을 마지막으로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고 한다.

변관식은 20대 이른 나이에 결혼하여 부인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지만 부인과 사별하였고 하필 그해 어머니와도 사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연유인지는 모르나 술도 좋아하고 방랑기가 있어 전라도 지역과 개성 평양 원산 등지를 수시로 다니며 체득한 한국적 향토 미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목가적 풍경으로 사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1937년 서화협회가 해산되자 금강산에 들어가 살다시피 하며 무수히 많은 소묘를 그렸다고 하며, 이때 탐방한 금강산의 풍경은 1950년대 후반 변관식의 화폭 속에서 생생한 현장감으로 재현되었다고 한다.

▲옥류청풍 그림ⓒ시민기자 유예숙

1930년대 소정의 화풍에서 주목할 점은 일본 화풍과 거리가 있는 남종 화풍을 구사했으며, 사생적 요소를 융합하여 새로운 화풍을 시도해 남종화 즉 동양화의 한 종류로 색깔을 안 쓰고 주로 먹물로만 그렸다고 한다. 또한 사경 사의가 결합된 현실경을 추구하였으며, 한국적 정취를 세밀한 필치로 운치 있게 묘사하여 고답적인 관념 산수로부터 벗어나고자 새로운 시도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1939년에는 화신화랑에서 개인전을 하여 금강산 산수 작품 다수 출품했으며 진주 강씨를 두 번째 아내로 맞아들여 58세에 득남을 했다고도 한다.
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창설되자 변관식은 1회와 2회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하였으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변관식은 처가인 진주로 피난하여 피난 시절 대한 도자기회사에서 도기화를 제작하다 도화에 소정이라고 호를 적었다고 한다. 1953년에는 정부 위탁으로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대관식에 보낼 외금강 옥류천을 그리기도 하였고, 부산 동아일보사 국제구락부에서 개인전을 갖기도 했으며 1954년 피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성북구 동선동에 돈암 산방이라는 화실을 마련하여 생애 말기까지 무수히 많은 수작들을 제작했다고 한다.

▲도화를 제작하는 변관식의 모습ⓒ시민기자 유예숙
▲외금강 옥류천 그림ⓒ시민기자 유예숙

1954년 3회 국전부터는 추천작가 그리고 초대 작가로 선정되었으며, 3회 국전부터 내분이 격화되자 그해 동아일보에 (위기의 동양화부), (편파적인 심위구성)들을 발표 심사위원 선정의 비공정성을 폭로하고 중견작가들의 국전 출품거부에 우려를 표명하였다. 국전 심사 비리의 내막을 알고 난 후로는 국전 심사를 하지 않았으며, 국전 심사의 비리에 격분하여 냉면 그릇을 집어던져 동료 교수 얼굴에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워낙 성품이 강직한 소유자로 따르는 제자들도 없었으며 대우도 받지 못했다는 후담도 들을 수 있었다.
1960년에는 서라벌예대(현 중앙대학교) 동양화과 강사로 나간 이후 10여 년간 제자들을 지도하였으며 내금강보덕굴을 제작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옥류청풍을 제작하고 1964년에는 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1969년에는 예총회관 화랑에서 내금강 단발령등 34점의 작품으로 (변관식 고희 기념작품전)을 가졌으며 이 시기 수도여자사범대(현 세종대학교)출강도 했다. 이 시기에 유일한 제자 겸 동료였다는 심경자는 아직 생존해 있다고 한다.

▲내금강 보덕굴 그림ⓒ시민기자 유예숙
▲문화훈장 국민장 시상식ⓒ시민기자 유예숙

1970년에는 ‘현대화랑에서 개관 1주년 기념전시회’ 초대 작가로 선정되어 출품하기도 했고, 1971년에는 ‘서울신문사 창간 26주년 기념전’인 (6대가 동양화전) 낙동강만추, 도원유수 등을 출품했으며, 이해 경희대 출강도 했다고 한다. 1974년 6월 ‘현대화랑에서 초대 개인전’을 갖고 단발령, 내금강진주담폭 등 60여 점을 출품했다.

▲내금강 진주담폭 그림ⓒ시민기자 유예숙

1975년 11월 월간중앙에 (시대정신을 배워야)라는 글을 싣고, 젊은 작가들이 그림을 그리는 기술을 배우기 전에 시대를 사는 정신을 배워야 한다고 역설을 했으며, 1976년 2월 타계 직전 내금강진주담을 그리고 2월 18일 서울 성북구 자택에서 타계 소식에 ‘금강산화의 독보적 경지’ ‘농촌을 그린 남화의 대가’라는 추모의 글이 각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고 한다. 현재는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직동리 묘소에 안장되어 있으며, 아들의 연이은 사업 실패로 경매에 넘어가 묘소가 이전될 뻔한 것을 알게 되어 포천예총 임승오 회장이 애정을 쏟아 관리하며 현재 10년째 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또한 최근 2019년에는 갤러리 현대에서 한국화의 두 거장 소정과 청전 전시회에도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고 한다.

▲포천 예총 회장 임승오ⓒ시민기자 유예숙
▲현대화랑 5주년 전시장에서ⓒ시민기자 유예숙

조선시대 겸재 정선이 진경산수화의 대가였다면 근대에서는 소정 변관식을 제일 비중을 둔다고 하며, 겸재 정선과 함께 금강산을 가장 많이 그린 화가라고 한다. 또한 소정이 금강산 가는 길목인 포천에 묘지를 마련한 것을 보면 포천과의 인연이 깊다고 볼 수 있으며 근대 예술사 최고의 거목이 잠들어 있는 지역으로 큰 의미와 가치가 있으며, 지역 문화의 시대에 시너지가 되는 포천의 인물로 재조명해 후세에 알리고 기리는 일은 포천의 몫이 아닐까? 포천의 문화발전을 위해서도 문학관이나 미술관의 건립과 홍보의 시급함이 절실하다는 생각이다.

▲외금강 삼선암 추색 변관식의 대표적인 작품ⓒ시민기자 유예숙
ⓒ시민기자 유예숙

진경산수화의 대가 소정 변관식의 이야기로 그림에 더욱 가까이 할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의 기회가 많은 사람들에게도 오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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