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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의 묘미를 한껏 느꼈던 인흥군묘 방문기
2021-12-14 조회수 : 2398

시민기자 변영숙

 

ⓒ시민기자 변영숙

짧은 겨울 해가 막 저수지 뒤로 넘어가려던 참이었다. 나뭇가지에 걸려서인가 해는 시원하게 물속으로 떨어지지 않고 오래도록 물가에 머물렀다. 저수지에 붉은 기운이 가득했다. 그 광경을 본 순간 이곳을 찾아온 목적도 잊어버리고 물가로 내처 달려갔다. 겨울날 해지는 순간은 참으로 특별하다. 눈부심이 적어 그 붉디붉은 덩어리도 온전히 눈에 담아 둘 수 있다. 저수지에는 물새 한 마리 날아들지 않았다. 참으로 고요한 해넘이였다. 점점 사위가 어둠 속에 잠기는 것을 보고서야 이곳을 찾은 이유를 깨달았다.

ⓒ시민기자 변영숙

그러고 보니 진흙 구덩이에 차바퀴가 빠질세라 잔뜩 긴장하고 힘을 주고 운전했더니 목까지 뻣뻣했다. 주소만 덜렁 들고 찾아 나섰던 인흥군묘 방문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내비가 알려준 곳은 밭 사이로 외딴 이면 도로 옆 주택 앞이었다. 다시 검색을 하고 마침 집 밖으로 나온 주민에게 물어서 겨우 인흥군묘를 찾았다. 인흥군묘를 찾아 길도 없는 산 고개를 넘었다. ‘머릿속에서는 이 길이 아니다’라고 하는데 발동한 호기심을 누를 수가 없다. 덤불이 가득한 야산 땅이 탄탄하게 다져져 있고 그 위로 자동차 바큇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다. 무슨 공사현장 같았다.

가까이 가보니 공동묘지를 조성하고 있는 중이었다. 야산을 계단식으로 정돈한 땅은 아직 떼를 입히지 않아 검붉은 흙이 드러나 있었다. 건물로 치면 3층짜리 건물이라고 해야 할까. 맨 아래층에 상석과 조화가 놓여 있고 꼭대기 층에는 검은색 돌에 망자의 이름이 새겨진 묘석들이 일렬로 줄 맞춰 놓여 있었다. 인흥군 13세 *** 인흥군 12세 *** 어딘가에 흩어져 있던 무덤들을 한곳으로 이장하는 과정인 듯했다. 이곳은 인흥군파 종중 묘역인 것이다.

인흥군묘는 어디에 있을까. 네비는 내가 서 있는 곳에서 2.3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안내한다. 그런데 네비가 알려준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난 바큇자국 선명한 흙길이 심상치 않았다. 인흥군묘는 잠시 밀어두고 탄탄하게 다듬어진 비포장 흙길을 따라갔다. 작은 야산을 넘은 것 같더니만 갑자기 시야에 거대한 무덤 군이 들어왔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곳이 인흥군 묘역이라는 것을.

앞쪽에는 자그마한 저수지 낚시터가 보였다. 능원낚시터라는 간판이 보였다. 애초에 '능원낚시터'를 입력하고 왔더라면 헤매지 않았을 텐데. 낚시터를 따라 묘역으로 가는 길이 잘 조성되어 있었다. 낚시터 방향에서 가까운 쪽에 2개의 묘역이 있고, 안쪽에 또 하나의 묘역이 있었다. 크게 세 개의 묘역이 있는 것이다. 가장 안쪽이 인흥군 묘역이고 그 좌측 묘역은 큰아들 낭선군과 진평군 등 왕실 가족묘역인 듯싶었다.

포천시의 설명에 따르면 ‘인흥군 묘역은 인흥군 이영, 낭선군 이우, 전평군 이곽 등 종친 3대의 묘역’으로 인흥군 신도비(2기), 낭선군 신도비, 인흥군 묘갈, 낭선군 묘표, 석양, 장명등 등 당대 최고 수준의 석조문화재가 현존하고 있다. 또한 조성 과정이 ‘정효공가승’등에 상세히 남아 인흥군 일가의 위상과 예술 수준을 파악할 수 있어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시민기자 변영숙

왕실 가족묘역부터 둘러보았다. 위쪽이 낭선군 이우의 묘역이고, 아래쪽이 전평군 이곽의 묘역으로 모두 4기의 봉분이 있었다. 봉분들이 모두 크고 묘석에 적힌 글자체들이 특이했다. 봉분에서 인흥군묘와 아래쪽 저수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시민기자 변영숙

이번에는 잘 정돈된 길을 따라 인흥군묘로 향했다. 2021년 12월 6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 예고되어 있다는 안내문이 걸려 있고 작은 안내판이 설치돼 있었다. 인흥군묘는 이미 1986년 포천시 향토유적으로 지정한 바 있다.

ⓒ시민기자 변영숙

인흥군묘에 오르니 눈앞에 아늑한 산세와 붉은 저녁들이 참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샘이 날 정도로 좋은 묘자리이다.

ⓒ시민기자 변영숙

인흥군묘는 거대한 구릉 위에 조성되어 있었는데 봉분의 크기가 지금껏 봐왔던 왕실 묘나 사대부 묘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크고 높았다. 내 키를 훌쩍 넘는 것을 보아 2미터가 훨씬 넘는듯했다. 봉분 뒤쪽으로 가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시민기자 변영숙

봉분 앞에 '왕자인흥군’이라는 글씨가 선명한 묘갈이 서 있다. 머릿돌의 용 문양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혼유석과 상석, 향로석 및 좌우에 망주석 2기가 세워져 있고 앞쪽에 장명등과 석양 2기가 있다. 봉분의 크기와는 다르게 묘역 전체는 상당히 소박한 느낌이다. 망주석, 상석, 장명등 석물에 빼곡하게 글자가 새겨진 것이 특이했다. ‘송씨 부인’등 몇 글자를 제외하고는 모르는 글씨가 태반이었다.

ⓒ시민기자 변영숙

묘역 아래에 신도비 2기가 서 있다. 설명에 따르면 하나는 효종 6년(1655)에 세워졌다. 당시 영의정을 지낸 이경석(1595~1671)이 비문을 짓고 아들 낭선군 이우가 글씨를 썼다. 숙종 8년(1682)에 세워진 신도비는 송시열(1607~1689)이 비문을 짓고 낭선군 이우가 글씨를 썼다.

ⓒ시민기자 변영숙

그런데 신도비 위치가 제자리에 서 있는 것이 맞나 싶을 만큼 엉뚱한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2기의 문인석은 신도비에서도 한참 떨어진 낚시터 입구에 서 있어 누군가 원래의 자리에서 옮겨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인흥군 묘역의 가장 큰 특징은 묘의 입구에 세워진 ‘묘계비’이다. 묘계비는 묘역의 경계를 표시함과 동시에 훼손을 막기 위해 세우는 일종의 경고비이다. 장남 낭선군이 1686년(숙종 12년)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282㎝이고, 비신 높이는 150cm 정도인데 비문이 한글로 적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번 답사에서 미처 챙겨 보지 못했다. 비문에는

'아비가극

히녕검ᄒᆞ

니ᄉᆡᆼ심도

사람이거

오디말라'라는 글귀가 적혀있다고 한다.

‘이 비가 극히 영검하니 허투른 마음 갖지 말고 예의를 갖추어라’라는 뜻이다. 이 비석은 17세기 한글의 음운 변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인흥군묘는 보기 드물게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다른 왕손들의 묘역에서 볼 수 없는 특징들이 답사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인흥군은 누구일까.

인흥군은 선조(1567~1608재위)와 후궁 정빈 민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선조의 14남 11녀 중 12남이다. 여산 송씨 송희업의 딸과 혼인하여 2남2녀를 두었다. 1652년(효종 3년) 1월 6일 46세로 사망했으며 묘는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양문리에 있다.

인흥군은 인조 23년 종부시, 사옹원 도제조를 역임하고 효종 즉위년 사은사로 청나라 연경에 가서 국방 문제와 척화파 기용에 관한 외교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저서로 <남한록(南漢錄)>과<연경록(燕京錄)>, <호서록(湖西錄)>, <월창야화(月窓夜話)>등이 있고 후대에 아들 낭선군이 정리한<선군유권(先君遺卷)>이 있다.

장남 낭선군 우(1637∼1693)는 글씨를 잘 썼으며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어 <대동금석첩(大東金石帖)>을 저술했다. 인흥군 신도비 글씨는 모두 낭선군 우가 썼다. 차남 낭원군 간(1640∼1699) 역시 글씨에 능해 여러 곳에 필적을 남겼다. 시조 일곱 수도 남아 있으며 <열성어제(列聖御製)>를 편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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