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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의 어제와 오늘! 옛 지명유래를 따라가본다.
2023-02-09 조회수 : 2286

시민기자 박광복

 

군내면 유교리(柳橋里)는 버드나무다리가 있었다고 해서 유다리 또는 유교(버드나무다리)라 했다.

군내면 전 면장 이병헌 님과 박광욱, 박재춘, 최재운 어르신들과 할머님들을 유교1리 경로회관에서 만나 옛 지명과 오늘 이야기를 나눴다. 옛 지명 이야기를 기록하고 후대에 남겨주고 싶다는 이병헌 전 면장님의 말씀에 고마움도 전했다.

기록에 의하면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유교리 일부를 자작동으로 이속 시키고 청량리 일부와 좌의리 일부리 병합하여 유교리라 하고 군내면(郡內面)에 편입하였다. 유교리는 현재 3개리로 나눠져 있다. 군내면은 4,300여 가구 수와 8,452명의 인구로 볼 때 전형적인 농촌의 2인 가족으로 되어 있다. 회관 앞 방향에 옛날 부잣집 양반이 살았을 사랑채와 본채가 보존되어 지금도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다. 포천의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시민기자 박광복

회관 안에서 만난 할머님들은 황새가 많이 살았던 유교3리에 가리동,가리피 마을을 기억하고 계셨다.

박광욱씨는 둔(단)뱅이에 '만석군'을 이뤘던 벌말을 기억하셨다. 벌말은 잡종지 땅으로 인구가 늘면서 개간을 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6군단 장병들이 농사짓고 살도록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지금도 유교1리는 박씨, 최씨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청수당쪽에 점집이 많아서 점말이라는 마을로 전해지고 있다.

ⓒ시민기자 박광복

박재춘, 최재운 어르신은 도당제를 모시던 오디나무와 우물이 없어지고 물독을 머리에 이고 내릴 때 편리하도록 하는 큰 돌 두 개만 남아 있음을 아쉬워하셨다. 유교리에서는 가장 오래되고 마을에 전설이 되는 이곳을 도당나무로 정해서 제를 모셨다고 한다.

박광욱씨는 어릴 적에 속이 빈 오디나무에서 놀았던 추억을 기억하고 어릴 적 동무들이 그립다고 했다. 유교길127번길 23-22에 지금은 밑돌만 존재하지만 우물터와 나무를 이용한 스토리텔링을 잘 만든다면 유교리에 훌륭한 유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지금은 좌의 3리에 편입된 장구 모양의 논이 있었다. 그래서 장구골이라은 명칭도 기억하고 있고, 논이 길어서 붙여진 이름 장배미도 있다. 요물고개, 정자고개, 청량교, 황새목이 고개도 있다.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산 지역임을 알 수 있는 마굿논, 과부새미, 구렁논, 섬논 등 정감이 가는 지명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포천의 지명유래) 개무덕이, 고두내들, 삼동구리, 석발팅이 등 구전되어 내려온 지명이 있으나 지금의 어느곳 인지 알 수 있는 어르신들은 만나지 못했다.

현재 6군단 앞에 모양이 방아다리처럼 생겨서 붙여진 '방아다리 들'을 이름을 기억하고 있으나 현재는 변형되고 개발되어 추억의 지명이 됐다. 유교 3리에 '엎드쟁이' 들녘도 추억의 지명이다. 6군단 앞에 너럭바위는 너무 커서 옮기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혹시 있다면 잘 보존 됐으면 좋겠다.

포천은 지명에서 보듯 물의 도시가 맞다. 한사람 논에만 물을 대는 독보(獨洑), 엎드쟁이보, 엿마지기보, 뽕나무자리보, 중보 ,홍개개울 등 유교리에만 보와 개울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포천천이 시내를 관통하면서 도시에 이름도 포천이다. 그곳에서 자라고 크는 토종풀과 어류가 시민들과 함께 평화롭게 공존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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