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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이 될 것인가? 가문의 영광을 지킬 것인가!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유응부와 김질
2019-06-28 조회수 : 3621

시민기자 이화준

1456년 6월 2일(음력, 양력은 7월 4일) 날이 밝았다. 당일 뜨는 해는 단종 복위를 위해 모인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과 마지막까지 뜻을 같이하다 가문의 영광과 개인의 영달을 위해 배신한 김 질의 운명을 갈라놓을 것이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포천에는 사육신 중의 한 명인 유응부를 기리기 위한 충목단(소흘읍 무봉리)이 있고, 이들을 밀고한 장본인인 김질의 묘(내촌면 음현리)도 있기에 1456년 역사 속 그날로 여행을 떠나본다.


▲충목단ⓒ시민기자 이화준

유응부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충목단


유응부는 무과에 급제한 후 세종 때 경원 도호부사를 거쳐 단종 때 평안 좌도 도절제사에 오른다. 1455년 윤 6월,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성삼문은 집현전에서 동문수학했던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등 뜻이 맞는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무인인 유응부도 거사에 합류하였다.

1456년 6월(음력) 떠나는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자리에 별운검으로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과 유응부가 지목된다. 왕의 가까운 거리에서 유일하게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직책이 바로 별운검이었기에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하지만 한명회는 연회 장소인 창덕궁 광연전이 좁고 더위가 심하다는 이유를 들어 별운검을 세우지 말고 세자도 참석하지 말자고 청하여 세조의 허락을 받아냈다.

유응부는 일이 누설될 가능성을 염려해 계획대로 일을 추진하자고 주장했고, 성삼문과 박팽년은 하늘의 뜻이니 후일을 기약하자고 했다. 결국, 거사가 연기되며 거사에 함께 참여했던 김질이 장인인 의정부 우찬성 정찬손에게 털어놓으며 거사가 들통났다.


▲충목단 비ⓒ시민기자 이화준

남효온이 남긴 <추강집(秋江集)>에 수록된 육신전(六臣傳)에는 유응부를 심문하는 내용이 실렸다. 심문을 받는 유응부는 세조 앞에서도 당당하게 세조를 ‘족하(足下)’라 불렀다. ‘족하’는 서로 대등한 사이에 부르는 호칭이다. 세조는 더욱 화가 나서 달군 쇠를 가져오게 하여 배 밑을 지지게 하니 기름과 불이 함께 이글이글 타올랐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고 호통을 치며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유응부는 1456년 6월 9일(양력 7월 10일) 군기감 앞에서 거열형(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매어 찢어 죽이는 형벌)으로 처형되었다.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유응부가 태어난 무봉리에는 충목단이 마련되었고, 충신을 기리기 위해 유허비를 세워 매년 가을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김질 묘(앞)와 부인 동래 정씨 묘(뒤)ⓒ시민기자 이화준


 가문의 영광을 지킨 김질(金礩)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가안(可安), 호는 쌍곡(雙谷). 증조할아버지는 조선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좌정승을 지낸 익원공 낙포 김사형(金士衡)이고, 할아버지는 동지밀직사사를 지낸 김승(金陞)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김종숙(金宗淑)이며, 어머니는 판제용감사 이양직(李良直)의 딸이다. 부인은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딸이고, 동생 김작(金碏)은 성종의 후궁 명빈 김씨(明嬪金氏)의 아버지이다.

이런 가문의 배경을 등에 업고 문음(門蔭-조상의 음덕으로 벼슬을 함)으로 충의위에 속해 있다가 부사가 되었을 때 성균관에서 수학하기를 청해 처음으로 허락받았다. 1450년(문종 즉위년) 추장 문과에 정과로 급제해 성균관 주부(主簿)에 임명된 이후, 우정언(右正言), 병조 좌랑을 거쳐 1455년(세조 1)에 사예(司藝)에 이르렀다.

이 무렵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의 집현전 학사와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는 모임을 몇 차례 가지던 중 위험을 느끼자, 1456년 장인인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세조에게 고변해 이른바 사육신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고변으로 세조로부터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를 제수받고 추충좌익공신(推忠左翼功臣) 3등이 되었다가 동부승지와 좌승지에 이르렀다. 이후 병조 참판, 평안도 관찰사, 공조 판서, 병조 판서, 형조 판서, 경사도 관찰사, 우의정, 좌의정 등에 올랐다.



유응부 장군을 기리는 충목단(포천시 소흘읍 무봉리 116번길 13)에서 단종 복위를 고변한 김 질의 묘(포천시 내촌면 음현리 772번지)까지는 직선거리로 7.6km, 차로는 15분 거리이다. 이들이 태어난 곳과 죽어 묻힌 곳이 경기도 포천의 지근거리라는 것이 참 역설적이다. 다가오는 7월 10일, 사육신을 기리기 위해 두 곳을 함께 둘러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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