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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에 돌이켜 생각해 보는 면암정신,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은 면암!
2023-03-06 조회수 : 1168

시민기자 유재술

 

지난 2021년 8월 대일항쟁기간 동안 일제와 맞서 싸워 크나큰 승리 봉오동 대첩에 빛나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멀리 카자흐스탄에서 대한민국 공군 전투기의 당당한 호위를 받으며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장군이 돌아가신지 무려 78년 만의 역사적 귀환이었다.

홍범도 장군의 업적에 견주어 전혀 손색이 없는 또 한 분의 포천 출신 항일 의병장이시며 전국 유림이 한결같은 하나의 목소리로 숭앙해 마지않는 위정척사의 사상가이며 순국지사인 면암 최익현 선생의 묘소가 고향 포천이 아닌 충청남도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 포천 시민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시민기자 유재술

선대의 조상님 또한 모두 고향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선영하에 잠들어 있고, 선생 또한 순국 직전 자신의 시신을 고향 선영에 묻어 줄 것을 유언하셨던 선생의 뜻과, 선생을 고향에서 봉사하고 싶은 후손들의 간절한 염원과는 달리, 전혀 아무런 연고도 없는 타향에 잠들어 계신 이 현실을, 우리 포천 시민은 또 어찌 생각할까 하는 답답함에 기자는 본 취재를 시작한다.

ⓒ시민기자 유재술

기자의 궁금증은 지난해 가을 우리 포천시 변영숙 기자가 다룬 ‘면암 최익현 선생 역사기념관 건립을 환영하며’라는 기사에서부터 출발한다. 변영숙 기자는 당시 기사에서 포천에 현존하는 채산사와 충남 청양에 있는 ‘모덕사’를 비교하며 규모와 내용면에서 너무나 다른 현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해당 기사를 대하는 순간 본 기자도 매우 당황했다.

그러나 그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항쟁 기간 동안 일본군에 체포되어 대마도에서 순국하신 뒤 선생의 시신이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그 묘소가 포천이 아닌 충남 예산에 있다는 사실은 또 한 번의 세찬 충격이었다. 이 같은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본 기자의 무지에 한심하다는 자책을 해야 했다. 왜 그랬을까.

ⓒ시민기자 유재술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옛 지명 가법리)에서 태어나신 면암 선생은 68세까지 향리에서 지내시다가, 일본군의 너무나도 삼엄한 감시에 꼼짝할 수 없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가솔들을 이끌고 충남 청양으로 이사를 하셨다. 그곳에 어떤 혈연적 또는 학문적 연고가 있어 평생 살아오신 고향을 등지고 새로 삶의 터전을 꾸렸는지는 분명하게 전해지는 이야기가 없다. 다만, 청양으로 몸을 피한 뒤 본격적인 의병활동이 시작되었으니, 일본과의 항일의병전쟁을 위해 이사를 하신 것만은 분명하다.

망국을 향해 가는 나라의 현실을 한시도 외면할 수 없었던 선생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그곳 청양으로 이사를 한 뒤 마냥 사랑에 들어앉아 있을 수 없어 노심초사하시다가 수년 뒤 74세가 되던 해에 전북 태인에서 의병장 임병찬과 기약 없는, 그러나 가열한 조국의 국권 회복 투쟁을 시작한다. 그러나 간악하게도 동포들을 총알받이로 내세워 의병 진압에 나선 일본군이었다. 이기고자 했으나 패전할 것을 뻔히 알고서도 동족을 살리고자 시작한 전쟁인 마당에 동족의 가슴에 총을 쏠 수 없다 판단한 선생은, 그만 패전하여 그들의 포로가 되어 대마도로 강제 압송된다.

살아서 다시는 조국 땅을 밟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버선 속에 흙 한 줌을 넣고 왜놈들이 주는 음식은 물론 물조차 거부하시며 가져가신 물 한동이로 버티시다가 선생이 나고 자란 고향 땅에 묻어줄 것을 유언으로 남기시며 끝내 타국 낯선 땅에서 숨을 거두신다.

ⓒ시니어오늘(2018. 8. 12. 자)

이후 선생의 유해는 고향 땅으로 향하며 부산으로 운구 되시는데, 선생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려 수많은 인파가 모이고 만장의 행렬만 5천 기가 넘었다 하니, 이에 심히 당황한 일본이 성난 민심이 대일 항쟁으로 번질 것을 우려하여 운구 행렬을 급히 축소하기에 이르나 오히려 날이 갈수록 선생의 애도 물결은 더욱 늘어나 일본 경찰로도 통제가 어렵게 되었다. 어렵고도 고단한 선생의 시신이 충청도 논산에 이르렀을 때,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던 일본은 논산 무동산 자락에 임시매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가매장되었던 선생의 시신은 얼마 뒤 다시 고향 포천을 향해 출발하여 현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에 이르러 일본의 강압에 의해 다시 임시 매장되었으나 이후 더는 나아가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이곳에서 잠들어 계신다.

ⓒ시민기자 유재술

선생의 유해가 고향 땅 포천으로 모셔져야 하는 당위성은 차고도 넘친다. 우선, 순국 전 선생의 유언이 있었음이다. 선생의 사상은 위정척사이다. 바로 여기에 절체절명의 명분이 있다. 올바름(正)을 위(爲)하고 간사함(邪)을 물리침(斥)이 위정척사라면, 고향 땅에 내 시신을 묻어달라는 선생의 유언을 받드는 것은 위정(爲正)이요, 그 뜻을 받들지 않고 멀리 타향의 외진 곳에 그대로 방치함은 사(邪)함이다.

더 이상의 무슨 말이 필요할까 마는, 더하여 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선영이 고향 포천에 있으니 이를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머나먼 땅 카자흐스탄에서 왜 조국으로 모셔졌는지 생각해 보면 스스로 답이 나올 것이다. 선생의 후손 또한 잠시 기거하셨던 충남 청양보다는 훨씬 더 많이 고향 포천에 집성촌을 이루며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대대로 살고 있으니 이 또한 명분이 앞선다.

ⓒ시민기자 유재술

조선의 선비들은 명분에 살고 명분에 죽는 대의를 따름이 그 첫 번째였다. 타국에서 순국하신 선생의 유언을 따르고 그래서 많은 후손들로 하여금 선생의 묘소를 돌보게 하며, 수많은 고향의 후학들이 그의 높은 뜻을 받들어 모시게 하는 갈망을 헤아려야 한다. 광시면 관음리 묘소 부근에는 선생의 어떤 후손도 살고 있이 않으며 다만, 충청남도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인만이 살고 있을 뿐이다.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는 사당과 유허비를 비롯한 유적이 전국적으로 40여 곳에 이른다. 모덕사에서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그 숭고한 뜻을 기리는 배향은 타당하다.

ⓒ시민기자 유재술

그러나 예산에 있는 선생의 유해는 선생의 유언에 따라, 또 꿈에도 그리는 후손들과 후학들의 뜻에 따라 반드시 빠른 시일 내에 고향 땅 포천으로 모셔져야 한다. 오늘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선생은 혈육 한 점 없는 낯선 땅 예산에서 통곡하고 계실 것이니, 선생의 서거 116주년을 맞아 부디 충청남도는 선생의 묘소 앞에 서 있는 춘추대의 비문처럼 대의명분에 따라 선생의 환향에 통큰 동의와 결단을 바랄 뿐이다.

[참고 : 청양군 발행 모덕사, 포천문화원 발행 포천문화 29호 기사 마지막 선비, 포천중일고 총동문회 발행 '반원산 밑 유서 깊은' 면암선생의 끝나지 않은 여정, 포천문화원 발행 '포천의 중심, 신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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