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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유림의 산실, 서원을 찾아서
1편 화산서원
2022-03-02 조회수 : 2746

시민기자 유재술


우리 포천의 역사를 통틀어 두드러진 인물은 아무래도 오성과 한음일 것이다. 두 분이 모두 뛰어난 정치가이자 학자였으며 한 시대를 풍미한 사대부였다. 그 두 분을 모신 서원이 포천에 있으니 바로 오성 이항복 선생을 모신 화산서원, 그리고 한음 이덕형 선생과 용주 조경 선생을 모신 용연서원이다. 여기에 청백리로 이름도 드높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사암 박순 선생을 모신 옥병서원까지 더해 우리 포천에는 모두 세 곳에 현존하는 서원이 있는 바, 오늘은 그 중 화산서원을 먼저 찾아가 본다.

[서원의 시초]

태조 이성계에 의해 조선왕조가 창업되면서 조선의 인재를 길러내는 지방의 교육기관으로는 고려후기부터 내려져 오던 향교가 먼저 자리를 잡았고 이어 중기로 접어들면서 서원이 그 뒤를 이었는데, 향교가 관(官)이 주도하는 교육기관이었다면 서원은 일종의 사학 교육기관이었다. 조선 중기 중종 때 경상도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이 후일 퇴계에 의해 국가로부터 ‘소수서원’이라는 최초로 사액을 받은 이래 상당한 숫자의 서원이 전국 각지에 건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두 기관이 도성이 아닌 지방에 있어 실질적 교육기관으로서의 양대 산맥이었던 셈이다.

[꽃뫼 화봉산에 자리한 화산서원]

ⓒ시민기자 유재술

화산서원은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 산 16-1에 위치한다. 당초에는 수원산 아래 옥금동에 사우를 짓고 백사서원이라 하였으나 후에 지금의 자리로 옮긴 후 사액을 받으면서 ‘화산서원’이라 고쳐 불렸으며 그 이름으로 오늘날에까지 이르고 있다.

ⓒ시민기자 유재술

서원을 들어서는 초입에는 궁궐이나 왕릉에서 볼 수 있는 하마비가 있는데 이곳이 매우 신성한 곳이므로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 걸어 올라가라는 뜻이다. 그 내리는 지점도 품계에 따라 각기 다르게 거리를 표시하고 있는데, 1품 이하는 궐문으로부터 10보, 3품 이하는 20보, 7품 이하는 30보 거리에서 말에서 내려야 한다.

대개는 대궐이나 왕릉 등에서 볼 수 있으나 서원에서 보기는 드물다. 그러나 혹간 사찰에서도 관찰되는 경우가 있으니 서원에 하마비가 있다 해서 잘못될 것은 없다.

ⓒ시민기자 유재술

하마비 다음으로는 백사 이항복 선생의 덕행을 숭모하는 신도비가 서있다. 백사 이항복 선생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선조 13년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참의 동승지 등의 벼슬을 거치고 병조판서와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당쟁의 조정에 힘썼으며 후에 청렴한 관리로서 ‘청백리’에 추대되었다. 백사 이항복의 후손들은 조선시대에 많은 정승들을 배출한 집안으로 유명하며, 이시영, 이회영 등 많은 인물들이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에 많은 기여를 했었다.

ⓒ시민기자 유재술

조금 걸어 오르다 보면 홍살문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는 역시 성현을 모신 사당이므로 삼가 경건한 마음으로 경내를 들어가라는 의미이다. 홍살문을 좌우에 두고 민가가 양쪽으로 있는 길을 조금 오르면 3개의 태극문양을 한 외삼문과 그 뒤로 단청을 칠하지 않은 건물이 두 채가 양쪽으로 보인다.

ⓒ시민기자 유재술

이 외삼문의 처마와 문 사이에는 화산(花山)이라는 이름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곳의 지명에서 유래되었음을 알게 한다. 예전에는 순우리말로 ‘꽃뫼’라 했지만 지금은 화봉산이라고 더 많이 불리는데 이 역시 지명과 관련되어 있음을 짐작게 한다. 외삼문을 들어가는 데는 작은 규범이 있다. 동입서출(東入西出)이라 하여 ‘사당에 모셔진 분이 볼 때 경내에 들어오는 사람은 동쪽으로 들어와서 서쪽으로 나간다’라는 개념이다.

ⓒ시민기자 유재술

외삼문을 들어서면 이내 야트막한 언덕에 또다시 삼문이 보이는데 내삼문이라 한다. 그러나 좌우에 동·서재가 있다. 왼쪽으로는 필운재(弼雲齋)라 씌여 있는 현판이 걸린 동재가 있는데 이는 선생이 한양에 살던 시절의 동네 이름이 필운동인데서 유래한다.

ⓒ시민기자 유재술

오른쪽에는 동강재(東岡齋)라 쓰인 현판이 있으며, 이는 서재로서 선생이 조선조 최고의 관직인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 벼슬에서 물러나 살던 사우의 지명이다. 영의정의 관직에서 물러나면 바로 향리로 내려갈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최고 관직에 있었던 자가 향리로 내려가 세력을 규합하여 불순한 음모를 꾸밀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왕의 심저에 내재된 조치였다.

필운재와 동강재 모두 현판의 글씨는 이 서원을 복원할 때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이 나라 최고의 재벌기업을 창업한 삼성 고 이병철 회장의 글씨라 한다. 두 건물의 용도가 각각 따로 용도가 지정됐던 것은 아니고 때론 강학과 토론이 오가고 더러 손님을 맞아 빈객의 예를 표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다른 서원과는 달리 강당이 없이 동재와 서재가 이를 대신하고 있음이 특이하다.

ⓒ시민기자 유재술

자, 그럼 이제 내삼문으로 들어가 보자. 긴 장대석으로 세 줄의 계단을 만들어 삼단으로 언덕을 따라 쌓아올린 기단 위에 내삼문이 세워져 있다. 내삼문의 태극문양은 신이 들어가시는 가운데 정문에만 배치되어 있는 것이 외삼문의 그것과는 또 다른 모양이다.

ⓒ시민기자 유재술

초현문(招賢門)이라는 이름에서 이미 이 건물의 용도를 알게 한다. ‘성현을 초대한다’라는 의미이니, 높은 학식과 세상을 경영한 정치가로서의 경륜과 덕망을 갖춘 이가 여기 모셔져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시민기자 유재술

다시 동쪽으로 들어가서 성현이 모셔져 있는 인덕전이 있다 현판은 화산서원이라 했고 작은 글씨로 현종경자 사액이라 했는데 아마 잘못 기록된 것이 아닐까 한다. 현종 때 경자년이면 즉위 다음 연도인데 이때 화산서원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효종 편 10년 윤 3월 28일자 기사에 의하면, ‘이항복(李恒福)을 제향하는 서원의 액호를 화산(花山)이라고 내리라고 명하였다.’라고 기술되어 있어 이때 임금의 명에 의해 사액되었음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시민기자 유재술

백사선생을 모신 서원은 전형적인 맛배지붕으로 둥그런 모양의 방풍널과 이 박공널을 지지하는 꺾쇠의 모양이 대단히 특이하다. 유사 건축물에서는 보기 어려운 모양이다.

ⓒ시민기자 유재술

서원 뒤로 돌아가면 다소 넓은 빈 공간의 잔디밭에 동그란 형태의 애기무덤 같은 봉분이 눈에 띈다. 15대 화산서원 원장으로 취임하여 이 서원을 총괄하시는 류금열 원장님의 말에 의하면, 고종이 즉위하면서 섭정을 하던 흥선대원군이 일부 문란한 서원의 폐해와 국가 재정의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 전국적인 서원 철폐령이 내렸을 때 이 화산서원도 폐원이 되었다 한다. 이때 백사선생의 위패를 이곳 땅에 매안하고 제사를 유림들이 지냈다고 한다. 서원은 비록 철폐되었지만 훗날 이곳에 서원을 다시 복원할 때 그 근거가 되었을 터이다.

ⓒ시민기자 유재술

서원의 뒤에서 보는 전망이 훌륭하다. 저 멀리에는 선생의 묘도 작게나마 볼 수 있어 향리에 묻힌 선생의 육신과 정신이 서로 소통하는 듯하다.

자, 그럼 서원 안으로 들어가 보자. 건물 안에는 그리 화려하지 않은 색상의 단청이 칠해진 내부의 모습이다.

ⓒ시민기자 유재술

매월 보름에 분향을 하는 제상과 선생의 위패를 모신 신주, 그리고 영정을 모신 닫집이 있다. 위패는 밤나무로 만들어 보존되고 있고, 근엄하다는 느낌보다는 인자함에 가까운 선생의 영정이 있고 영정과 위패 위에 광해군 시절 선생이 상소로서 인목대비 폐모 불가에 대한 헌의를 올린 친필초의가 액자로 되어 걸려 있다.

ⓒ시민기자 유재술

그 어떤 당쟁에도 휩쓸리지 않는 탁월한 경륜의 정치가였던 선생은 결국 이 헌의 한 장으로 중풍에 걸린 몸임에도 불구하고 저 머나먼 함경도 오지 북청으로 유배되어 지내다가 채 1년이 안되어 그곳에서 돌아가시게 되는데, 유배 중에도 후학들을 교육하는 등 후진 양성에 힘써 그 뜻을 기리고자 유생들이 그 북청이라는 곳에 선생을 모신 서원이 있었으니, 바로 노덕서원이다.

사실, 서원이 철폐되는 순서는 첩설, 즉 같은 위인을 두 곳에서 중첩되게 모셨을 때 폐원되는 것이 우선이었다. 철폐령이 내려졌을 때 노덕서원과 화산서원의 대표자들이 타협하기를, 포천에는 선생의 묘가 있으나 북청에는 선생을 기릴만한 그 무엇도 없으니 북청의 노덕서원을 존치하고 포천의 화산서원은 철폐에 응하자, 하여 이에 화산서원이 동의하였고 그래서 없어지게 된 것이지 화산서원 자체가 어떤 폐해의 문제가 있어 그리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시민기자 유재술

처절했던 저 왜구들과의 7년의 긴 전쟁이 끝나고 공신의 책록이 있었을 때 선생은 국난을 극복한 공이 크게 인정되어 호성 1등 공신에 봉해졌던 바, 사후 선생의 시호를 문충공이라 했는데, 문신의 최고 영예는 문(文)이라는 글자로 시작되는 시호이고 무신에게는 충(忠)이라는 시호가 으뜸의 영예이니, 문충공이라 하는 시호는 임진왜란이라는 국가 존망의 시기에 이를 극복한 선생의 크나큰 공이 인정되고 또 문무 모두에 힘쓴 선생에게 내려진 최상의 예우가 아니었을까.

바야흐로 인문학이 각광받는 이 시대에, 우리 한국의 역사와 포천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반정의 빌미를 제공한 광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북청으로 유배를 가면서 지은 그의 저 유명한 시조 한 구절을 원문으로 읊조리며 이만 글을 마감하고자 한다.

 

철령(鐵嶺)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삼아 띄여다가
님 계신 구중심처(九重深處)에 뿌려본들 엇더리.

[참고자료 - 포천군지 1997년 발행, 화산서원 자료제공,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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