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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저수지 기행 ⑤자작지, 동교지, 솥다리지
한음 이덕형의 외가와 저수지 인근의 역사 이야기
2020-01-08 조회수 : 4735

시민기자 이화준

포천의 진산으로 불려온 왕방산과 천보산에 있는 저수지, 서울에서 80리 떨어진 첫 동네 초가팔리의 저수지를 돌아본다.


▲자작 저수지ⓒ시민기자 이화준

자작 저수지
자작 저수지가 있는 자작동은 왕방산 아래 자리해 자제기라 하였으며, 문화 류씨(文化柳氏)가 정착하여 마을을 만들었다고 하여 자작리가 되었다. 또한, 자작동에는 고대 백제인의 생활 유적지가 발굴되었고,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고인돌이 있다.

자작 저수지는 홍수 예방과 농업용수 공급을 목적으로 1965년에 착공하여, 1969년에 준공하였다. 자작 저수지의 총저수량은 7만 톤, 유효 저수량은 6만 3,500t이며, 사수량은 6,500t이다. 둑의 길이는 156m, 둑 높이는 9.5m이다.

왕방산에서 흘러 내려온 물을 저장하는 자작 저수지, 저수지를 한 바퀴 도는데 채 10분도 안 걸리지만 수려한 왕방산과 세월을 긷는 강태공들의 손놀림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류인선 효우비ⓒ시민기자 이화준

류인선 효우비
자작 저수지 인근 논밭에 있는 류인선 효우비, 논 귀퉁이에 자리해 사진을 찍기에도 공간이 좁아 버겁다.

류인선(1492~?)은 성종 23년 이곳 자작촌에서 출생했다. 자는 공숙(公叔),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천성이 어질고 착해 부모님을 극진히 모셨고, 돌아가신 뒤에도 묘 앞에 초가를 짓고 3년 상을 치렀다. 또한, 5형제가 한집에 살면서 우애가 뛰어나 명종 4년(1549)에는 조정에서 효우 정려를 내렸다. 이에 앞서 중종 30년(1535) 경기도 관찰사 윤은필이 도내에 이름난 효자로 그를 천거하였고, 1549년 그 집안에 효우문 정표가 내려져 양사언이 [효우문전]을 짓기도 하였다. 중종 35년(1540)에는 왕명을 받들어 한성판윤 김안국, 예조판서 정옥형 등에게 천거되어 유일로 사산감역(서울 주변에 있는 네 산의 감독관)에 제수 되었다. 류인선 집 안에 있던 우물을 당시 효우정이라 불렸는데 현재는 논이 되었고, 효우 정려도 없어졌지만, 1735년 6세손인 류세주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의현에게 비문을 받아 세운 효우비는 전해지고 있다.

류인선과 자작촌에서 함께 살았던 동생 중 현감을 지낸 의정공 류예선이 있다. 그는 양세보의 딸과 혼인하여 영의정이 된 아들 류전과 이민성에게 출가한 딸을 낳게 된다. 이민성에게 출가한 류씨 부인이 바로 한음 이덕형의 어머니이다. 류씨 부인은 자작동에서 한음 이덕형을 낳았다. 또 이덕형이 6세 때 외숙부인 류전(柳琠)을 따라와 자작동에 머물면서 인근의 윤우신에게서 수업을 받았고, 영평 우두연이라는 곳에서는 양사언 형제와도 교유하였다고 한다. 이 비석이야말로 한음 이덕형이 포천과의 인연을 나타내주는 유일한 유물이다.

동교 저수지
‘하늘 밑의 보배로운 산’이란 뜻을 갖은 천보산, 이 천보산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고이는 동교 저수지에는 어떤 보화가 숨어 있을까?


▲동교 저수지ⓒ시민기자 이화준

동교 저수지가 있는 동교동은 장마가 지고 물살이 거세지면 마을에 있던 다리가 잘 뜬다고 하여 뜬다리, 동다리 또는 동교라고 불렀다. 이젠 저수지가 생기며 다리가 뜰 일은 없어졌다.

동교 저수지는 홍수 예방과 농업용수 공급을 목적으로 1965년에 착공하여, 1965년에 준공하였다. 총저수량은 14만 톤, 유효 저수량은 12만 7,000t이고, 사수량은 1만 3,000t이다. 둑의 길이는 78m이고, 둑 높이는 10.5m이다.

고성 군사 정포 묘


▲정포 묘역ⓒ시민기자 이화준

동교 저수지 아래 큼지막한 묘가 있다. 조선 시대 봉정대부이며 고성 군사를 지낸 정 포의 묘이다. 아들은 지평을 지낸 정충기이고, 손자 정탁은 상의원첨정을 지냈고, 증손자인 정순붕은 중종반정 후 정국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고, 조광조와 함께 신진 사류의 일원이 되어 조정을 개혁하려 하였지만, 기묘사화 때 파직되며 17년 동안 조정에 나가지 못했다. 1538년 복권되어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공조 참판이 되었다. 이후 윤원형, 이기, 허자와 가깝게 지내며, 명종 때 을사사화를 일으켜 1등 공신이 되며 우의정에 올랐다. 이런 내력으로 그의 증조할아버지인 정포까지 관직이 추증되어 사후 이조판서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사림들이 대거 정치에 복귀한 선조 때 정순붕의 직위가 모두 추탈되었다.


▲솥다리 저수지ⓒ시민기자 이화준

솥다리 저수지
솥다리 저수지가 위치한 초가팔리는 서울에서 북쪽으로 80리가 되는 첫 동네라 하여 이름 붙여졌다.

솥다리 저수지는 홍수 예방과 농업용수 공급을 목적으로 1945년에 착공하여, 1945년에 준공하였다. 저수지의 총저수량은 8,000t, 유효 저수량은 8,000t이며, 사수량은 없다. 둑의 길이는 291m, 둑 높이는 3.5m이다.

특이한 이름만큼 지명에 관한 유례가 있을 줄 알았는데, ‘솥다리’에 관한 지명 유래를 찾을 수 없었다. 또한, 평지에 조성되었고 오래된 저수지라 관리가 필요해 보인다.

후대에 만들어진 저수지이지만, 인근의 역사 유적을 함께 둘러보며 장구한 세월 속에 잠깐의 부귀영화가 덧없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포천 저수지 기행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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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된 의견글 1
  • 조한섭 2020-01-10 삭제
    지역의 역사 잘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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