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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의 3·1 독립 만세 운동
2016-02-25 조회수 : 5530

일제 강점기 1919년 3월 1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 고종의 장례식 날.
 
손병희(孫秉熙)를 총대표로 하는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다. 이때 서울 탑골 공원에서 군집해 있던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대한독립 만세” 외치기 시작하자,  마른 장작불에 기름을 붙듯 독립 운동은 전국과 해외까지 확산되기 시작한다.

‘그 시작은 미약했다’

1919년 3월 13일, 포천 공립 보통학교와 같은 시각 영중면에 위치한 영평 공립 보통학교의 학생들이 학교 뒷산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기 시작하면서 우리 마을 포천에도 3·1운동이 불붙기 시작했다.

‘첫 대중적이고 조직적인 시위’

1919년 3월 24일, 영중면 영평리와 소흘면 송우리에서 보다 대중적이고 조직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난다. 영평리에서 약 1,000여 명의 주민들이 군청 사무소를 습격하여 친일 면장을 응징하고 영평 헌병 분견소를 공격했다. 같은 날 송우리에서도 주민 600여명이 독립운동을 펼친다. 그러나 헌병 경찰들의 강력한 진압에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3월 29일에는 소흘면 무봉리와 군내면 유교리에서도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가장 뜨거웠던 포천의 대한독립 만세 운동’

1919년 3월 30일, 약 2000여 명의 소흘읍 주민과 가산면 주민은 가산면의 독립운동 총책임자인 최석휴(崔錫休)[1888~1919]의 지휘아래 신북면 면사무소 앞에서 최대 규모의 그리고 가장 강력했던 ‘포천의 대한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날의 만세 운동은 기존에 진행되었던 3월 24일 송우리 만세 시위와 3월 29일 무봉리 만세 운동에서 시위 주동자로 분류되어 일본 헌병들에게 체포된 독립운동가 들을 구출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헌병 분견소에 대한 물리적인 공격이 진행되었고, 송우 헌병 분견소에서 인근 헌병 분견대의 지원을 받을 정도로 격렬하고 대대적인 독립운동이 진행되었다.

▲1919년 3월 30일 포천의 대한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한 신북면사무소의 전경
ⓒ 한국향토문화 전자대전 (디지털 포천문화대전)

 
‘꺼지지 않는 불씨’
 
1919년 4월, 3월의 뜨거웠던 우리 마을 포천의 만세 운동은 4월에도 대한독립에 대한 염원을 담아 그 열기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4월 1일에는 일동면, 기산면 주민 200여명이 만세 운동을 벌였다. 4월 3일에는 일동면 장암리 주민 500여 명과 노곡리 주민 400여 명이 각각 만세 운동을 진행하였다. 4월 4일에도 영북면 자일리에서 안응건의 만세운동이 기도되었다.

※ 포천의 3·1운동 만세지 정리

1. 포천 공립 보통 학교 : 포천시 신읍길 40 포천초등학교
2. 영평 공립 보통 학교 : 포천시 영중면 영평리 240 영평초등학교
3. 송우리 헌병 분견소 만세지 : 포천시 소홀읍 소흘 파출소 주변
4. 무봉리 만세지 : 포천시 소흘읍 무봉리 569번지 일대
5. 신북면사무소 터 만세지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889번지 일대


자랑스러운 우리 마을 포천출신의 독립운동가

구한말 의병 운동의 중심지였던 우리 마을 포천은 독립운동 또한 매우 활발하게 진행 되었다. 특히, 항일 의병장이자 성리학자인 최익현(崔益鉉,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태생 [1833~1906]의 우국 애민 정신과 위정척사 사상(바른 것을 지키고 옳지 못한 것을 물리친다)은 향후 독립운동가 들의 정신적 이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위정척사운동과 항일구국항쟁운동을 한 애국자 최익현 선생의 동상
ⓒ한국향토문화 전자대전 (디지털 포천 문화대전)


1. 포천의 3·1 운동 관련 독립운동가

* 최석휴(崔錫休) , 포천시 가산면 감암리 태생 [1888~1919]

1919년 3월 30일, 포천의 가장 뜨거웠던 대한독립 만세운동의 가산면 총책임자로서 청년들을 독려하여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사전에 준비했다. 1,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운동을 진행했다. 그 이후 장소를 옮겨 이웃마을 포천군 소흘면 주재소를 습격하였으나 일본 경찰이 쏜 총탄에 맞아 32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1977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 훈장 애국장 추서]

* 안응건(安應乾) , 포천시 영북면 자일리 태생 [1887~?]

포천지역의 3·1운동이 전개되는 시기에 그는 자신의 집에서 태극기를 제작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니 모이지 않으면 방화한다.”는 만세운동 독려 글을 작성한다. 1919년 4월 4일 밤, 마을의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하고 만세운동 독려 글을 마을 게시판에 붙였으나 일제 헌병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법정에서 치안 방해 협의로 징역 1년을 선고 받았다. 이에 불복 항소하여 무죄 선고를 받고 석방된다.

* 함병현(咸炳鉉) , 포천시 영중면 양문리 태생 [1860~?]

1919년 3월 30일, 신북면사무소 앞 1,000여 명의 군중과 더불어 독립 선언식을 거행하고 대한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시위행진을 벌였다. 이를 저지하는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의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1995년 건국 포장 추서]

* 조훈식(趙薰植) , 경기도 연천군 영근면 은대리 태생 [1864~?]

1919년 3월 29일, 서당 교사였던 조훈식은 포천시 신북면에서 동민들을 규합하기 위해 취지서 10통을 작성하여 배포한다. 취지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튿날 30일 아침 포천군 신북면사무소 앞에 집합하여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칠 터이니, 이민(里民)들을 선동하여 이에 참가시키라. 만약 불응하면 집에 불을 놓고 기타 위험한 피해를 입힐 것이다.’
1919년 3월 30일, 조훈식은 1,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신북면사무소 앞에서 독립 선언식을 거행한 후 대한 독립 만세 시위행진을 전개한다. 그러던 중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징역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1995년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포천시

2. 포천의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가

* 이규채(李圭彩) , 포천시 가산면 방출리 태생 [1888~1948]

1930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단체인 한국 독립당(韓國獨立黨)에 가입하여활동하면서 총무 위원장까지 역임하였다. 1934년에는 신한 독립당(新韓獨立黨)을 새롭게 조직하고 감찰 위원장(監察委員長)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35년에 중국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징역 10년의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미소 공동 위원회 대책 국민 연맹 대표,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회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1963년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 김영관(金榮觀) , 포천시 영중면 영송리 태생 [1924~?]

일제에 의해 강제 징병된 이후,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고 한국광복군에 편입하였다. 주요 활동으로는 중국 유격대와 합동으로 정보 선전 공작을 전개 하였다. 특히 적 포로를 심문하여 일선 및 후방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여 공작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6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 강지형(姜芝馨) , 포천시 가산면 정교리 태생 [1881~1931]

왕정 복구를 목적으로 만주 지역에 근거를 두고 있던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 독립단(大韓獨立團)에서 활동하였다. 대한 독립단의 강지형은 국외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조직을 구축하고 군자금 모집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1921년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징역 3년의 옥고를 치렀다. [196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


*주요 참고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디지털 포천 문화대전)

시민기자 최세용(csy0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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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된 의견글 1
  • 심선경 2016-02-29 삭제
    왜 이제서야 알려주시나요...ㅠㅠ 뜻깊은 날 가까운 곳에서 아이들 데리고 갈수 있는 시간에 서울이나 다른 지역에 가서 아이들에게 설명하면서 보낸 시간들도 좀덜 힘겨웠을텐데... 좀 더 광범위하게 홍보해서 포천에서 천만이 아니 더 큰 만세운동운로 행사가 이뤄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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