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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속 LTE 광통신망, 독산 봉수대 터를 찾아서...!
2022-11-25 조회수 : 1768

시민기자 유재술

 

누구나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는 요즈음이다. 하다못해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아이들도 휴대폰을 다 사용하고 있는 이 시대의 통신 발달은, 그러나 불과 5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도 못하던, 지금은 정보의 교환이 넘쳐나는 시대이다. 개인 간에는 가까이 있으면 서로 말과 글로써 의사소통을 하겠으나 멀리 떨어져 있으면 서신을 주고받는 일로써 서로의 의사를 전달해야 했으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는 것이 문제인데, 군사적 목적으로 인편을 통한 정보를 주고받는 것이 파발 등의 수단을 통해서 해야만 한다면 이 역시 신속한 국방의 대처하기가 대단히 힘들었을 것이다. 전란이라는 것에 대비한다는 것은 빠른 대처에 따라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불과 연기를 통해 통신을 주고받던 봉수제도이다.

봉수란 무엇인가. 낮에는 연기를 이용하고 밤에는 불을 피워서 변방의 위급한 소식을 중앙정부에 전달하는 수단이다. 그럼 그 기원은 어떻게 될까. 영원한 동양의 고전이라는 나관중의 ‘삼국지’에도 촉나라의 관우가 위나라 조조의 군사가 침입 사실을 봉화로 알렸다는 기록이 있으니 기원전에 중국에서는 봉수 제도를 사용했다는 설이 가능하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될까. 삼국시대에도 이미 봉수 제도는 운영되고 있었으나 제도화로 정립된 시기는 고려시대로 본다. 고려 현종 20년 봉수 제도가 정립되어 각종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조선은 고려의 제도를 본받아 발전시켜 계승했으며, 1894년 고종 31년 우정총국이 설립되면서 봉수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시민기자 유재술

그렇다면 우리 포천의 봉수 관련 유적은 어떨까. 사실 포천은 조선시대 내내 국경을 괴롭혔던 저 만주 땅의 여진족인 야인이 조선 조정에 사신으로 오는 길목에 있었다. 그만큼 군사 전략적으로 중요한 길목에 있었다는 말이다.

우리 포천에는 관인면 냉정리의 할미산(봉화산) 봉수지, 영북면 자일리의 적골산 봉수지, 영북면 야미리의 미로곡 봉수지, 신북면 기지리 독산 봉수지, 내촌면 진목리의 넙재(잉읍점) 봉수지 등 총 5기의 봉수대 터가 남아 있으나, 대부분 벙커나 토치카 등 군사적 목적의 시설물을 구축하면서 다 없어져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봉수대는 단 한곳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지 않아 상대적으로 군사시설이 들어서 있지 않은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독산(禿山), 일명 봉화산에 어느 정도 유구들이 남아있어 어렴풋이 봉수대의 규모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오늘은 일명 유촌양촌이라 불리는 기지리 마을 뒷산의 독산 봉수대 터를 탐방해 본다.

▲관인면 냉정리 할미산(봉화산) 봉수대 터

▲ 창수면 주원리 할미산 간봉 봉수대 터로 추정ⓒ시민기자 유재술

독산의 말 자체가 대머리 禿 자로 산꼭대기에 나무가 없어 대머리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봉화를 위한 땔감으로 쓰였을 것이니 민둥산이 되어버린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해발 200미터가 조금 넘는 나지막한 산이다. 높디높은 고지의 산 정상이 아니라 심하게 말하면 야산에 불과한 높이의 정상에 봉수대가 설치된 까닭은 무엇일까.

ⓒ시민기자 유재술

이는 봉수대에 근무하는 봉군의 규모와 관련이 깊다. 이번 답사하는 내지 봉수의 경우 오장 2명과 봉수군 6명을 합하여 총 8명이 교대 근무를 해야 하는데, 산이 높은 고지를 선정하여 봉수대를 설치할 경우 근무에 상당한 고충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면 이 봉수대는 어디서 신호를 받아 어디로 보냈을까. 조선의 봉수는 총 5개의 노선이 있었는데, 경상도 부산, 전라도 등 남해안, 평안도의 의주, 함길도의 삼수, 함경도의 경흥이며, 모두 한양의 목멱산(남산)에 집중되도록 설계되었다. 당시로서는 초고속이라 할 수 있는데, 변방의 적정이 12시간이면 한양에 닿을 수 있었다.

ⓒ시민기자 유재술

이중 포천의 봉수는 함경도의 경흥에서 출발하는 신호로, 15km 떨어진 영북면 야미리 미로곡의 봉수대가 전하는 정보를 12km 남쪽의 내촌면 진목리 넙재(잉읍점) 봉수대에 전달하여 남양주 대이산 봉수대와 아차산 봉수대를 거쳐 곧바로(直烽) 목멱산(남산) 봉수대로 전달되었던 중요한 군사시설이었다. 봉수대 간의 거리는 통상 10km 정도인데, 이는 날씨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 봉화의 상태를 육안에 의해 곧바로 확인할 수 있는 거리 내에 위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신호를 전달했을까. 주로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로 전달했는데, 적정의 동태에 따라 평시에는 1개의 봉수로, 적이 국경 근처에 나타나면 2개의 봉수를, 적이 국경을 침범할 우려가 있으면 3개, 적이 도강을 하거나 국경을 넘어 쳐들어오면 4개, 전쟁이 발발하여 전투 중이면 5개의 봉수에 불을 피워(擧火) 위급의 상태를 보고했다.

또 봉수군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봉수군의 임무는, 첫째 외부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후망(높은 곳에 올라가 살핌)과 감시, 둘째 외부의 칩임이나 금수로부터 자체방호, 셋째 변경의 상황을 알리는 신호전달, 넷째 큰 사변이나 자연재해로부터의 시설의 개보수였다.

다음으로 이들은 무엇을 태워 불을 피웠으며 그 재료는 무엇이었을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로 정보를 전달했으니(晝煙夜火), 그 재료나 태우는 방법이 궁금하다. 낮에 피우는 연기는 바람에 영향을 잘 받지 않는 낭분, 즉 이리의 똥을 주된 재료로 하여 사용해야 했으나 구하기가 쉽지 않아 말똥이나 소똥을 주로 썼다. 이마저도 비가 내리거나 구름이 잔뜩 낀 날씨라면 관측이 불가하여 포를 쏘거나 태평소 등의 각(角)을 써서 신호를 전달했다. 상대적으로 밤에는 불빛을 주고받는데 큰 어려움이 없어 봉화대 안에 횃불을 피우는 방법을 썼다.

독산의 봉수대는 안내 표지판이 없다면 무엇이 있었는지 생각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복원이 안 되어있을 뿐 제초작업 등 관리는 잘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민기자 유재술

다만, 흙으로 다져 단(壇)을 쌓은 흔적과 봉수대를 만드는데 쓰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돌이 사방에 가득하며, 북쪽에서 남쪽을 보면 토단 위에 돌무덤이 약 5개 정도 보이는 것으로 보아 화로가 5개 있었을 것으로 보여 충실한 자료와 정밀한 고증을 한다면 복원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한다.

ⓒ시민기자 유재술

더구나 이 봉수대가 설치되었던 독산은 인근에 매일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아트밸리’라는 명소가 있고, 또 400미터가 넘는 천주산이 가까이에 있어 이곳에 봉수대가 복원된다면 연계 관광이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시민기자 유재술

서울 남산의 봉수대는 N타워와 함께 서울시민뿐만 아니라 모든 대한민국 국민과 외국인도 많이 찾는 관광명소이다.

▲서울 목멱산(남산)의 봉수대ⓒ시민기자 유재술

문화관광의 도시를 지향하는 우리 포천시에서 적극 검토하여 독산 봉수대를 훌륭하게 복원하기를 기대해 본다.

[참고자료 – 대한산업공학회/한국경영과학회 2002년 공동학술대회 논문(윤원영), 조선시대 봉수대와 봉수군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홍성우), 포천군지(1997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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