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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의병, 참전용사 박홍진 회장을 만나다
의병 독수리 유격대


박홍진(85) 독수리유격대 기념사업회장

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날, 호국로 43번 지방도를 따라 달린다. 산하는 봄의 기운을 받아 연록빛으로 싱그럽게 물들어 있다. 청정한 포천의 자연에 취해 한참을 달리다 문득 시선에 잡히는 것이 있다. 시뻘건 38선 휴게소. 그 앞에 흐르는 영평천만 건너면 아주 오래 전 그날에는 이 지역부터 북한이었다고 한다. 주민들이 평온하게 유유자적 걷고 있는 이곳이, 우리가 밟아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온다. 평화로운 이 땅을, 이곳에 터를 잡고 사는 주민을 대한민국 영토와 국민으로 만들기 위해 피를 흘렸던 산 증인이 바로 옆에 있다. 전쟁 당시 23세의 꽃다웠던 청년은 세월이 주는 주름과 함께 노인이 되었다. 박홍진. 그는 6.25전쟁 참전 용사다. 하지만 군번 없는 의병이었다는 이유로 전쟁이 끝난 후 40여년이 지나서야 인정을 받은, 용사다. 그가 말하는 의병 ‘독수리 유격대’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의병 ‘독수리 유격대’

1950년 6.25전쟁 당시에 싸웠던 건 군인만이 아니었다. 민간인이 ‘자발적’으로 구성해 조직한 의병도 상당수 있다. 그리고 포천에는 63인의 ‘독수리 유격대’가 있었다. 국민 모두가 남쪽으로 피난 가는 시절에, 최전방 포천을 사수하기 위해 뭉친 독수리 유격대원은 북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당시 23세였던 박홍진 회장 역시 유격대에 자원했다. 가족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유격대 대원 대부분이 형제, 친족 사이가 많았고, 포천 출신인데다 고학력자들이었다. 덕분에 독수리 유격대는 명민했고 골육지정의 전투애로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또한 포천 지리에 밝다는 이점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독수리 유격대는 수색대로 전쟁에 임하게 된다. 전쟁의 최일선에서 적정을 살피는 수색대는 언제나 목숨을 담보로 나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독수리 유격대는 언제나 절대복종하며 적진을 살피는데 앞장섰다. 수많은 전투 속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휴전 중에도 373고지전과 734고지전에서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고지 탈환을 이루어냈다. 그 결과가 우리가 밟고 있는 포천의 영평천 이북 땅 일대와 철원이다.
 
독수리 유격대 추념식

억울한 죽음도 꺾지 못한 애국심

그러나 독수리 유격대는 군번 없는 군인인지라 군인들 사이에서도 미운 오리새끼가 되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연대본부로부터 보급품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해 현역에 비해 항상 열악한 조건에서 전쟁터를 나가야 했다. 그래도 대원들은 전쟁 중이니 불만을 갖지 않고 본분에만 충실했다. 그러던 중 중공군이 포천으로 쳐들어오고 있음을 발견하고 본부에 보고했으나 상부에서는 믿지 않았다. 군인의 정보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결과는 뻔했다. 중공군이 며칠 후 포천을 덮치고 서울까지 빼앗기는 1.4후퇴(1951년)가 발생하고 만 것이다. 다행이 3월2일 서울을 되찾았으나 유격대의 크나큰 불행은 그 사이에 일어나고 만다.

유격대가 소속해있던 17연대 1대대 부대대장 김영필대위는 평소 독수리 유격대를 아꼈다. 김대위가 소령으로 진급하면서 32연대 3대대장으로 전속하게 되자 독수리 유격대를 데려갔다. 그러나 17연대 1대대장 소령은 이 같은 사실에 분개해 유격대를 복귀케 하고 간부 5명을 군법이라는 명목 하에 즉결처분, 즉 총살을 했다. 58명의 나머지 대원은 군복은 물론 군화까지 벗겨 중공군이 주둔한 지역으로 내몰며 부대에서 추방을 하고 만 것이다.

총살된 최종성 유격대장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해군에 징용당하고도 살아 돌아 왔고, 전쟁 이전에는 서북청년단원으로 대공정보원으로 반공일선에서 활약한 진정한 영웅이었다. 그런 영웅의 목숨이 너무나 어이없이 아군의 손에 의해 사라지고 말았다. 총살된 간부들의 애국심과 전투전력 역시 무모한 감정싸움으로 총살되기에는 억울했다.

잔류 유격대원들은 억하심정이 생길 법도 한데 그보다는 나라를 지키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판단. 목숨을 걸고 적진을 넘어 32연대 3대대로 되찾아가 군대로 복귀해 1953년 7월까지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했다. 경기 가평 설악면 전투, 청평수력발전소도하 작전, 사창리 하오고개전투, 금화 천불산 373고지 전투 등에 참가하면서 8명이 전사하고 5명 부상, 1명이 포로로 잡혔다. 유격대 63인 중 즉결처분된 간부 5인까지 총 14명의 희생을 낳으며 1950년 11월부터 시작된 유격대의 참전은 만 3년 만에 끝이 났다. 하지만 박홍진 회장을 비롯한 일부 대원은 전쟁에 참가한 것이 인정이 안 되어 귀향하자마자 다시 영장을 받고 현역으로 입대해야만 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가며 싸웠으나 나라는 이들의 공을 세워주기는 커녕 감싸주지도 못했다.


독수리유격대가 책으로 발간

다행히 1989년, 유족들의 진정서가 받아들여지고 조사가 이루어져 유공자들의 명예가 회복되고, 독수리유격대 전적비가 관음산에 세워졌다. 관음산은 유격대의 첫 번째 희생자가 있던 지역으로 매년 현충일이 되면 생존대원은 물론 유족과 포천시, 군관계자들이 찾아와 유격대원의 숭고한 정신을 기린다. 또한 박홍진 회장을 필두로 한 독수리유격대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이 모든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해 “포천의 의병 군번 없는 영웅 호국성 독수리유격대”라는 책을 지난 2012년 12월에 발간했다. 군부대를 중심으로 배포되어 잊혀 가는 호국영웅의 정신을 다시 뿌리내려주고 있다.

이젠, 영웅이 아닌 아름다운 사람으로

박홍진 회장, 그가 현재 아름다운 이유는 참전 용사여서가 아니다. 그는 목숨을 바쳐 얻은 지난날의 영광에만 기대어 살지도, 전쟁 후의 트라우마에 갇혀 살지도 않는다. 그는 언제나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해 산다. 향년 8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사진작가라고 당당히 밝힌다. 망원 렌즈로 숭고한 자연을 담기도 하고, 위장복을 입고 숨죽여 기다려 철새들의 자태를 찍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단순히 아름다운 자연을 담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사진 속에는 역사가 묻혀있다. 그가 힘들게 산을 타고 바위를 올라 포천의 시가지를 고루 담는 이유는 그 자체가 역사이기 때문이다. 10년, 20년이 흐른 뒤, 포천의 발전상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사진 자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선견지명이다.

당장 내일만을 향해 달리는 젊은이는 모르는, 미래를 위한 현재의 준비. 우리가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하는 것도 미래를 위해서다. 아픈 전쟁이 있었기에 앞으로는 전쟁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박 회장의 말과 함께 붉은 꽃잎이 눈물처럼 떨어진다.

편집위원 최명옥(sea3rai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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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된 의견글 1
  • Nasr 2013-08-06 삭제
    Gosh, I wish I would have had that inorimatfon earl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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