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문화&관광

  • 시민기자
  • 문화&관광
이동면 역사문화탐방
2018-04-11 조회수 : 3562

이동면은 조선시대 영평현에 소속되어 동면이라 부르던 곳이다. 영평현 동쪽에 있어 동면이라 부르다가 둘로 나누어 남쪽은 일동면, 북쪽은 이동면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 북한 치하에 들어갔다가 6·25전쟁 때 회복하였다.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은 백운계곡의 기암괴석과 이동 막걸리, 이동 갈비가 유명하다.

○ 동음사(洞陰祠)


▲동음사 ⓒ시민기자 이화준


동음사는 안산 김씨 선조인 촌로(村老) 김성대와 그의 동생 반성재(反省齎) 김성발(金聲發), 동구(東丘) 김성옥(金聲玉) 및 청풍 김씨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 등 네 명을 봉향한 사당이다. 1833년(순조 33) 건립된 사당은 1907년 일본인들에 의해 반소되어 1914년에 보수하였으나 1925년 6·25 전쟁 때 전소되었다. 1961년 11월에 포천의 유림과 후손들에 의해 사당 건립이 발기되고 이듬해인 1962년 9월에 준공되었다. 사당인 승현재에는 김성대와 김평묵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제향일은 매년 3월 중해일(中亥日)이다.


▲동음사 신도비 ⓒ시민기자 이화준

*김성대(金聲大)[1622(광해군 14)~1695(숙종 21)]

김성대의 자는 이원, 호는 율강·촌로이다. 아버지는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내고 좌승지에 증직된 김찬(金讚)이며, 어머니는 안동 김씨(安東金氏)이다. 효자 김성발(金聲發), 김성옥(金聲玉)의 형이다. 김성대는 어려서부터 인품이 뛰어나고 덕이 많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노쇠한 부모님을 모시고 백운산 깊이 숨어서 살았다. 아버지가 병석에 눕게 되자 약제와 음식을 손수 마련하였으며, 아버지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판단하여 약을 쓰며 간호하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아버지의 입에 넣어 얼마간 소생하였으나 끝내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몹시 쇠약하여 자녀들이 극구 만류함에도 애통해하면서 상제로서 예를 다하였다. 김성대는 일찍이 과거 시험에 뜻을 두어 초시(初試)에 여러 차례 합격하였으나 복시(覆試)에는 낙방하였다. 1693년(숙종 19) 72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는데, 숙종이 멀리서 바라보다가 “저기 늙은이는 무엇 때문에 왔는가?”라고 물으니 주위에서 “진사시를 보러 온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숙종이 즉석에서 ‘촌로’라는 호를 하사하고 “늙은이가 먼 곳에서 왔으니 참봉이라도 하나 주어라.” 해서 개성에 있는 제릉 참봉으로 임명하였다. 2년 뒤인 1695년(숙종 21)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묘는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도평리 백운산 아래에 있다. 김창집이 촌로묘표(村老墓表)와 묘갈명을 썼다. 사후에 자헌대부에 추증되었고 영조 때에는 대사헌에 재차 추증되었다.

○동화사(東和寺)


▲동화사 대웅전ⓒ시민기자 이화준

1957년에 신도 이간대(李干大)가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장암리 476에 동화사(東和寺)를 창건하였다. 동화사 대웅전에 있는 목조불좌상은 한국전쟁 중 빨치산 활동의 근거지였던 회문산(전라북도 순창, 해발 830m) 만일사에 봉안돼 있던 불상이며, 전쟁의 포화 속에서 이후락(李厚洛)이 소유하고 있던 것으로 동화사가 창건된 후 승려 변희준을 위해 이곳에 기증되었다”고 전언되며 현재 동화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이 불상은 조각승의 계보를 이은 사인 스님이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목조여래좌상은 높이가 101.5cm로 조선 후기에 제작된 중형 불상으로, 신체는 은행나무로, 바닥 면은 소나무로 제작되었다.


▲동화사 대웅전 안에 모셔진 목조불좌상ⓒ시민기자 이화준

1972년 개금불사를 할 때 발견된 복장 발원문(현재는 임사본만 남아 있고, 원본은 도난)에 의해, 1649년(인조 27) 7월 16일 수조각승 사인(思忍)과 차조각승 상림(尙琳)이 가섭, 아난, 16나한, 제석, 장군, 사자 등을 조성한 후 전라북도 순창 회문산 만일사(萬日寺)에 봉안되었던 불상임이 확인되었다. 현재 나머지 불상들의 소재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본존 석가불만 동화사에 이안되었다.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석가불상과 같이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대웅전 앞에는 삼층 석탑 1기와 2기의 석등과 범종이 있는 종각이 자리하고 있다.

○흥룡사 청암부도

흥룡사는 문화재 관리국에서 편찬한 『문화 유적 총람』에 “고려 태조 때 도선 국사가 창건한 절이라 하나 지금의 대웅전은 6·25 전쟁 이후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절 내에는 청암 스님의 부도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부도에 대해서는 “1922년 설하 스님이 중수한 후 흥룡사라 하였는데 청암 스님의 사리를 모신 곳으로 전해지는 팔각 원당형의 부도로서 조각은 거칠고 조선 후기에 많이 볼 수 있는 형식이다. 높이 1.7m, 둘레 3.2m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흥룡사 청암부도(좌)ⓒ시민기자 이화준

대석(臺石)은 모서리에 각을 주어 팔각의 평면을 유지하도록 하였으며, 특이한 문양의 연화문(蓮花紋)을 장식하였다. 탑신석(塔身石)은 대석 상부와 옥개석(屋蓋石) 하부에 시설된 홈에 끼워 고정되도록 하였으며, 가운데가 배부른 원구형(圓球刑)이다. 옥개석은 하부에 추녀와 사래를 표현하였으며, 그 사이에 고사리무늬가 좌우 대칭을 이루도록 장식하였다. 처마는 살짝 치켜 올렸으며, 처마 면의 높이가 두툼하고 합각부를 부드럽게 올린 조로 수법을 보인다. 전체 높이는 158㎝, 탑신석은 61㎝, 옥개석은 83㎝이다. 탑신석의 한쪽 면을 평평하게 하여 ‘청암당(淸巖堂)’이라고 주인공의 명문을 음각하였다.

○독수리유격대 전적비

 
▲독수리유격대 전적비ⓒ시민기자 이화준

광복 후 영평천의 삼팔선 경계로 남북 간에 습격 방화 약탈이 빈번하였다. 경찰과 국군은 치안과 방어력의 열세를 보완하기 위하여 젊은이들을 청년단이나 의용소방대로 충원하여 군이나 경찰과 연계하며 향토방위와 치안을 유지하였다. 국군이나 경찰은 반공의 기치를 내세웠던 서북청년단이 대공 작전이나 정보 수집에 이들을 활용하였다.
서북청년단과 최종성과 최종철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5~20여 명의 대원을 모아 동두천 방향으로 후퇴를 시작하여 충청도 지방으로 내려가 경찰과 연합하면서 대공 투쟁을 시작하였다. 서울이 수복되자 포천에 돌아와 대원을 70여 명으로 증설하여 1950년 11월 30일 대한 청년단 간부인 최종성·최종철 형제를 주축으로 포천군 신읍에서 나라와 고향을 지키려는 포천 지역 젊은이 63명이 독수리 유격대를 결성하였다.


▲독수리유격대 명단ⓒ시민기자 이화준

자체적으로 향토방위에 주안을 하던 무장 유격대는 규모를 확장하고 포천 국민학교로 본부를 옮기고 “독수리유격대”라는 부대 명칭을 사용하면서 육군본부에서 파견된 교관(대위)으로부터 전술과 제식훈련을 하였다. 아군의 전세는 더욱 불리해지고 17연대 1대대가 후퇴하여 일동에 주둔하자 독수리유격대는 1대대와 합류하였고, 이들의 활동을 높이 평가한 제17연대 김영필 대위가 당시 제2사단 32연대 3대대장으로 진급하면서 이들 유격대를 데려가려고 이동을 지시하였다. 그러자 독수리유격대의 집단 이동을 뒤늦게 알게 된 제17연대 1대대장 유 모 소령이 헌병을 시켜 이들을 원대 복귀시키고 이들을 집단 총살하려고 하였다. 결국 최종성 유격대장을 비롯한 간부 5명은 탈영이라는 죄목으로 억울하게 총살되었고, 유격대는 강제 추방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나머지 대원들은 김익수를 새 대장으로 유격대를 조직하여 충청북도에 주둔 중이던 제32연대에 편입하여 1.4 후퇴 때 충북 중원군 동량면 목행리에 주둔을 한다. 이곳에서 독수리유격대는 경상북도의 의성·청송·안동·예천·풍기 지역과 충청북도의 제천·단양 지역에서 인민군 10사단과 공비들을 토벌하였고, 김화 지구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6·25 전쟁 중 많은 공을 세웠으나 이들 중 8명이 전사하고 5명이 상처를 입었으며, 대장 김익수는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휴전 후 귀향하는 등의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독수리유격대는 포천에서 유일한 민간 의병부대였다.

○도평리 수복기념탑

▲도평리 수복기념탑 ⓒ시민기자 이화준

포천 일대는 1950년 6월 25일부터 10월, 1951년 1월에서 3월 두 차례 걸쳐 북한 점령하에 있다가 1951년 3월 24일 유엔군의 반격작전으로 완전히 수복하게 되었다. 중공군 공세에 미 제3사단은 호킨스 특수임무 부대를 편성하여 의정부, 포천에 진출하였으나 중공군 제26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치열한 접전을 수행하였다. 이에 사단장은 제187공수 연대가 덕정리 북쪽 퇴로를 차단하도록 명령하였다. 연대의 공격이 개시되면서 미 제3사단 정면의 적이 퇴각하기 시작하였고, 3월 28일 동두천-포천 일대를 완전히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중공군 제26군은 포천 북쪽 종현산 부근으로 철수하여 재편성을 기도하였다.
미 제8군과 국군 제5군단은 공동 주관으로 1954년 10월 15일 포천 수복을 기념하기 위해 이 탑을 건립하였다. 수복탑의 제막식에는 이승만 대통령도 참석하여 '收復記念塔'이라는 휘호를 썼고, 미 제8군 단장 카터비 마구르더 중장, 국군 초대 제5군 단장 최영희 중장 등이 참석하였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디지털포천문화대전
포천문화원
독수리유격대홈페이지
전쟁기념관
문화재 안내표지판


시민기자 이화준

OPEN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제4유형: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본 공공저작물은 “공공누리” 제 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목록보기
만족도 조사
이 페이지에 대한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평가 1명 / 평균 1
의견글 작성
의견글을 작성해 주세요.
최대 500자 / 현재 0자
  • 계산하여 답을 쓰세요
※ 불건전한 내용이나 기사와 관련 없는 의견은 관리자 임의로 삭제할 수 있습니다.
뒤로가기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