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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차사의 길 – 43번 국도를 걷다
이성계의 첫째 부인이 살았던 부인터
유일하게 살아돌아온 함흥차사 성석린
2019-04-29 조회수 : 6180

시민기자 서상경

포천시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43번 국도는 조선 시대 한양에서 원산에 이르는 경흥대로와 그대로 겹친다. 많은 사람이 이용했던 길이고 옛길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그 길을 따라 걷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옛길의 흔적을 쫓아 축석령에서 강원도 철원군과의 경계인 자일리까지 43번 국도를 따라 한 번 걸어보기로 했다. 전체거리는 42km, 약 100리 길이다.


▲축석령ⓒ시민기자 서상경

부인터의 부인은 누구? 이성계의 첫째 부인 한 씨.

조선 중기 포천 어룡동에 오백주는 아버지 병환이 깊어지자 영약을 찾아 길을 헤맸다. 꿈에 신령이 나타나 어느 산 고개의 큰 바위 아래로 가보라 하매 그리하였다. 그런데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막았고 밤새도록 빌어 길을 지나 약을 구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빌 축(祝)', '돌 석(石)' 자를 써서 축석이라 했다. 축석령은 오늘날 포천시 관문으로 43번 국도 따라 걷기도 이곳에서 시작한다.

자연마을 무란을 지나고 송우가구거리를 통과하자 무봉리 경계에서 부인터 사거리를 만난다. 마을 앞뒤로 큰 봉우리가 있었으므로 거친봉이 또는 무봉이라 하였다는데 오늘날 어떤 봉우리를 말하는지 모르겠다. 부인터 사거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포천시 북쪽에 궁예와 관련 지명이 많다면 남쪽에는 이성계와 관련된 땅이름이 꽤 있다. 내촌면 마명리의 참나무쟁이, 내촌면 음현리의 여덟밤이, 소흘읍 이동교리의 부인터 등이다. 부인터는 이성계의 첫째 부인 한 씨가 살았던 곳이라 붙은 이름이다.


▲43번 국도ⓒ시민기자 서상경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함흥차사 성석린


송우리를 지나고 선단리를 통과할 즈음에는 장승거리라는 지명이 보인다. 조선 시대 공문을 급히 보내기 위하여 설치한 역참이 있었던 곳의 마을 이름이 파발막이다. 지금은 장승거리라는 표석으로 남아 있고 대진대학교 주변이라 옛날처럼 제법 번화한 거리를 이루고 있다. 이곳의 왼쪽이 포천의 진산 왕방산이요, 오른쪽은 넓은 들판인데 발걸음이 북쪽으로 향할수록 논밭이 드러나고 포천천의 긴 물줄기도 얼굴을 내민다.


▲장승거리 표석ⓒ시민기자 서상경

왕방산 아래는 포천 출신의 문신 성석린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조선 시대 왕권을 둘러싼 초유의 사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으로 시작된 왕자의 난은 이성계에게 뼈아픈 상처를 남겼다. 아끼던 두 아들 방번과 방석을 잃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성계는 한양을 떠나 고향 함흥으로 가버리고 그곳에서 이를 갈게 된다. 조선의 3대 임금 태종으로 등극한 이방원은 아버지를 위안하고 문안을 올린다는 명분으로 함흥에 차사(差使)를 보냈으나 돌아오는 이가 없었다. 이 기약 없는 길을 떠난 이들을 함흥차사라 부르거니와 조선 시대의 경흥로, 오늘날 43번 국도가 지나는 길이다. 함흥차사의 악연을 끊은 이가 성석린이다. 그는 함흥으로 가면서 경흥로를 밟았고 돌아오면서 다시 경흥로를 밟아 살아서 돌아온 함흥차사가 되었다. 이후 태조 이성계는 마음이 다소 풀려 의정부까지 돌아오게 된다.


▲포천시청ⓒ시민기자 서상경

금강산 가는 길목, 경흥로의 중심 양문리


포천시청이 있는 포천동을 지나고 신북면을 지난다. 이곳에는 조선 인조의 셋째아들 인평대군의 묘소가 있고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용연서원이 있다. 그리고 만세교를 지나고 금주리에 들어서면 영평 8경의 하나인 청학동을 만난다. 청학동은 어느 가난한 효자가 아버지의 시신을 이장하기 위해 삽을 뜨는 순간 그 속에서 청학 한 마리가 나와 슬프게 울면서 창공에 원을 그리며 날아갔다는 데서 유래한다. 옛사람들의 상상력은 이처럼 슬프고도 아름답다.
이곳 외에도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영평 8경에는 화적연, 와룡암, 선유담, 금수정, 백로주, 창옥병, 낙귀정지 등이 있으니 이곳의 아름다움을 무엇에 빗댈 수 있었을까. 영평이라는 지명은 조선 태조 때 영흥현이 영평현으로 개칭되면서 생겨났으며 이후에 사암 박순 등의 인물들이 이곳에 머물 때 자연스럽게 유래된 풍광 8곳이 영평 8경이다.


▲용연서원ⓒ시민기자 서상경

어느덧 발걸음은 조선 시대 역이 있었다는 양문리에 닿는다. 한양 도성을 출발하여 경흥로를 따라 포천을 지났던 옛 함흥차사는 어스름 저녁 무렵 양문역에 닿아 하룻밤을 묵었을 것이다. 함흥차사뿐이었겠는가.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했으니 유람을 즐기는 여행객도 이용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양문역에는 역마가 있었고 숙박도 할 수 있었는데 오늘날도 양문리는 교통의 중심지다.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흔적들

양문리에서 1km 거리에는 3.8선 휴게소가 있다. 포천천과 영평천이 만나는 지점인데 광복 후에는 영평천 건너편이 북한지역이었다고 한다. 군사적 대치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38선은 우리에게 무한한 상상을 제공해준다. 그 옛날 조선의 선비들이 영평천에 발 담그고 산수를 즐기며 쉬어가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니 오늘날의 휴게소와 그 맥이 닿는다고 해야 할까.


▲38선 휴게소ⓒ시민기자 서상경

영중면을 지나면 영북면이다. 고개를 넘어서니 타일랜드 참전 기념비가 나온다. 6·25전쟁 때 우리를 도와준 태국군을 위해 참전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남의 나라에서 자국의 젊은이를 희생시킨 것을 자유와 평화라는 이름으로 위안할 수 있을까? 그것도 자그마치 1,296명이 희생되었다 한다.

발걸음이 북으로 향할수록 전쟁의 참상이 쓰리게 전해온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경제가 활발했다는 영북면 운천리를 지나자 구름내 현충공원이 나오고 오른쪽은 거대한 산군이 모습을 드러낸다. 궁예의 전설 어린 울음산, 곧 명성산이다. 그리고 철원과의 경계지점에 도착할 무렵 수복기념탑이 보인다. 영북면 자일에 있는 포천, 철원지역의 수복기념비다.

드디어 43번 국도는 강원도 경계지점에 닿았다. 한국 안보관광 1번지라는 철원군이다. 조선 후기 물류유통이 발달하고 장시가 활성화되면서 포천의 경흥로는 조선 시대 물자수송로이자 중요한 간선로 중의 하나였다. 삼국시대에도 이 길은 주요 군사요충지 역할을 담당했는데 반월산성과 고모리 산성이 그 유적이라 하겠다. 비록 남북이 휴전선으로 나뉘어 있지만 이렇게 수많은 역사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43번 국도에는 여전히 수많은 차량이 통행하고 있음을 본다.

*43번 국도 도보여행 일정
- 첫째 날 : 축석령~군단 앞(12km, 3시간 40분)
- 둘째 날 : 군단 앞~양문리(16km, 4시간 20분)
- 셋째 날 : 양문리~자일리(14km, 3시간 50분)


*참조
- <포천지명 유래>(포천문화원),
- 디지털 포천문화 대전 홈페이지
http://pocheon.grandcultur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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