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
소식지
- 홈
- 소식지
포천소식 지면소식지의 개별기사는 모바일 환경으로 접속 하였을 때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 외의 환경에서는 아래의 목록을 통해 PDF 보기로 제공됩니다.
예로부터 포천은 선비의 고향이었다. 지리적으로 한양과 가까워 왕족과 사대부의 후손들이 세거하였고 유교문화를 주도했다. 지금 포천에는 경기도 지정문화재인 포천향교와 세 곳의 서원이 남아 있는데 사암 박순 등을 모신 옥병서원, 한음 이덕형과 조경을 모신 용연서원, 백사 이항복을 모신 화산서원이 그것이다.
▲ 오성 이항복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화산서원(포천시 가산면 소재)
오성대감 이항복의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 그가 태어난 곳은 지금의 서울 종로구 필운동이었지만 포천은 조부 때부터 은거했던 곳으로 그의 묘소도 이곳에 있다. 훗날 포천의 선비들이 사당을 지어 신주를 모시고 학문과 덕행을 논하는 화산서원을 세웠는데 오늘날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에 있다. 다음은 화산서원 안내 글이다.
『이항복은 1580년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의주까지 호종했으며 전쟁을 지휘하여 국난극복에 힘썼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1604년 공신으로 기록되었다.』
원래 화산서원은 1631년 가산면 옥금동에 지어졌으며 이항복의 호를 따서 백사서원이라고 칭했다. 1635년에는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었고 1659년에 화산으로 사액을 받았다. 그리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71년 다시 사당을 짓고 선생의 위패와 영정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서원은 조선시대에 각 지역의 유학자들이 세운 사립교육기관으로 선현의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하던 곳이다. 화산서원의 사당은 인덕전으로 제일 위쪽에 자리잡았고 그 아래 백사의 또 다른 호인 필운과 동강을 따서 필운재와 동강재를 동서재로 건립하여 배움터로 사용했다.
화산서원을 뒤로 하고 2km 거리에 있는 백사 이항복의 묘소를 찾았다. 아래쪽에 신도비와 영정을 봉안한 영당이 있다. 안내문의 내용은 화산서원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광해군 때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를 몰아내는데 반대하다가 1618년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묘역에는 봉분이 2개 있는데 왼쪽의 묘는 이항복의 무덤이고 오른쪽의 묘가 부인 안동권씨 무덤이다. 무덤 앞에는 묘비,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고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각 한 쌍씩 자리하고 있다.
오른쪽 10m 거리에는 또 하나의 무덤이 있다. 이항복의 둘째부인 금성오씨의 무덤이다. 둘째 부인이었지만 임진왜란 때 오성이 임금을 모시고 의주로 피난하자 같이 동행하며 뒷바라지를 했다. 또한 백사가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자 상여를 운구하여 지금의 자리에 장례지내고 6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고 한다. 그러한 공으로 받은 정경부인의 직첩이 묘비에 기록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백사의 높은 공덕 덕분인지 풍수에서 말하는 명당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백사 이후의 경주이씨 문중은 조선 명문가로 올라섰다는 점이다. 정승이 6명, 대제학이 2명 외에도 많은 판서를 배출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50여 명의 독립운동가도 나왔다. 한일합방 후 백사의 11대손 아들 6형제는 전 가족이 가진 재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는가 하면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명문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실천한 것이다.
조선의 4대 문장가 중의 한 사람으로 영의정을 지낸 신흠은 이항복의 신도비에 이렇게 썼다. “백사가 63세로 세상을 떠나자 귀양지인 함경도 북청에서 선산이 있는 경기도 포천에 장사를 지낼 때까지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찾아와 울고 절하면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고 장사를 지낼 때는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 않고 모두 찾아와 통곡하며 제물과 제문을 바치는 사람이 끊일 줄 몰랐다.”
벼슬이 좌의정에 올랐지만 셋집살이를 했다는 백사 이항복,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라를 구해낸 공로가 인정되어 오성부원군에 봉해졌는데 그로부터 백사 이항복은 오성대감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에게는 당파를 벗어나 오직 국가와 백성이 있을 뿐이었고 그의 청렴한 공직생활은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을 터. 그래서인지 오늘날에도 화산서원과 선생의 묘소에는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