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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 변영숙
© 시민기자 변영숙
지난 7일 개최된 ‘백사 이항복 유적지’ 개관식에는 백영현 포천시장을 비롯해 임종훈 포천시의회 의장, 이현우 경주 이씨 중앙화수회장, 이종찬 광복회장 등이 참석해 기념관 개관을 축하하는 한편, 앞으로 유적지가 포천의 역사와 문화를 더 많이 알리는 데 기여하기를 기원했다.
백영현 포천시장은 “유적지 조성에 협력해 준 경주 이씨 문중과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경기도에 깊이 감사드린다”라며 “이항복 선생의 유적지를 통해 포천의 역사와 문화를 더 많은 분들이 경험하길 바라며 앞으로도 포천을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인문도시로 발전시키기 위해 힘쓰겠다”라고 말했다.
백사 이항복 유적지는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일대에 총 5,610㎡ 규모로 유물기념관, 교육관, 관리동으로 꾸며졌다. 그동안 도로변에 이항복 선생의 묘와 신도비만 덩그러니 있는 모습이 쓸쓸해 보였는데 이번 기념관 건립으로 ‘유적지’의 구색을 갖추게 됐다.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유적지는 2019년 경주 이씨 백사공파 종가의 사업 부지 기부채납과 경기도 특별 조정 교부금 등 29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어 지난해 12월 준공, 올해 11월에 완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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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기자 변영숙
출입문인 외삼문을 통해 들어서면 넓은 마당과 함께 기념관, 관리동, 교육관 등 세 개의 건물이 보인다. 기념관 입구 정면에는 이항복 선생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그 외 다양한 역사 유물과 사료 등이 전시돼 있다.
선생의 생애와 ‘오성과 한음의 우정’ 등 선생과 관련된 일화들이 텍스트 패널에 소개돼 있다. 이항복 선생은 1556년 서울에서 태어나 1580년 문과에 급제했다. 이름은 항복, 호는 백사, 시호는 문충공이다. 좌의정, 우의정, 이조참판,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는 동안 어느 당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이고 공정하게 정사를 돌본 문인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이 선생은 생전에 5번의 공신 추대를 받았으며, 조선시대 대표적인 청백리로 ‘죽으면 베옷이 아닌 평상복을 입혀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광해군 때 인목왕후를 몰아내는 데 반대하다가 1618년 함경도 함흥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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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안쪽에 초상화 한 점이 더 걸려 있다. 선생이 58세 때 그려진 이 초상화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안전하게 의주까지 피신시킨 공을 인정받아 1613년 호성공신 1등 교서를 받고 그 기념으로 제작됐다. 호성공신 1등 교서도 전시돼 있다. 오늘날 유일하게 전하는 호성공신 1등 교서이다. 교서에 가려진 이름이 있어 흥미롭다. 가려진 이름은 ‘정언군’이다. 후에 ‘인조’가 된 인물이다. 왕위에 오르면서 호성공신 명부에서 지운 것이다. 교서의 글씨를 쓴 이는 당대 명필 한석봉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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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선생의 가계도가 흥미롭다. 10세손으로 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 등 6형제는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해 만주로 이주,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을 조달하는 등 대한민국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이시영은 초대 정부 부통령을 역임했다. 이항복 대감의 유전자가 면면히 그 후손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을 보면 문화 해설사의 말처럼 집안의 DNA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친일파 집안에 대대로 친일파가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기념관의 규모는 작지만 평소 이항복 선생의 인품과 학식, 나라에 대한 충정을 되새길 수 있는 귀중한 유산이 가득하다. 기념관 맞은편에는 교육관이 있다. 아직 시설을 완전히 갖추지 못했지만 이곳에서는 학생들을 위한 교육, 세미나 공간 등으로 활용될 계획이다. 이항복 선생 진품 유적 17점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