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주요소식

  • 시민기자
  • 주요소식
신분의 장벽을 뛰어넘은 조선시대 최고의 공학자
2015-04-20 조회수 : 5039

4월 21일은 과학의 날이다. 과학의 날은 현대사회의 과거, 현재, 미래를 만들어 가는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고취하고 과학기술자에 대한 사회적 대우를 제고하기 위해 제정, 공포된 국가기념일이다. 이번 과학의 날을 맞아 우리사회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과학자를 선별하여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과학하면 떠오르는 수많은 스타과학자들이 있다. 전기를 발명한 에디슨, 상대성이론의 발견자 아인슈타인,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관성의 법칙을 터득한 아이작 뉴턴, 노벨상의 창시자 노벨 등이 그 좋은 사례일 것이다. 조금 더 살펴보면 우리민족의 과학사에도 이들 세계의 스타과학자들과 견주어 손색이 없는 과학자가 있으니 바로 조선 최고의 발명왕 장영실이다.



▲장영실 상 (출처 : www.wikipedia.org, Himasaram) 

위인은 위인을 알아본 것일까?
 
조선시대 전체를 통 털어 가장 뛰어난 왕을 손꼽으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조선의 4대 왕인 세종대왕을 떠올릴 것이다.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뿐만 아니라 군사제도를 개편하여 북방(4군 6진)을 개척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농사관련 서적인 「농사직설」 및 최초의 지리책 「팔도지리지」 등 훌륭한 책을 편찬하는 등 수많은 업적을 이룬 위대한 임금인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뛰어난 인재를 각별히 여기고 중용했던 세종대왕은 손재주가 뛰어난 지방의 일개 관노(관가의 노비)인 장영실을 궁궐의 기술자로 전격 발탁하였다. 또한 그의 과학적 재능을 간파하고 1421년(세종 3년) 중국으로 유학을 보내 선진문물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세종대왕은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장영실에게 정5품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에 임명한다.

파격인사 성과로 보답하다.

제련·축성·농기구·무기 등의 수리에 뛰어난 손재주를 보였다고는 하나, 중국에서 조선으로 귀화한 아버지와 관가의 기생출신인 어머니를 둔 장영실의 벼슬길 입성은 조선시대의 엄격한 신분제도를 고려해 보았을 때 가히 파격인사라고 할 수 있다.
 
인사권자인 세종대왕으로서도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뛰어난 과학적 마인드를 소유한 장영실은 인사권자의 파격인사에 보답이라도 하듯 거침없이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어 내며 실력과 성과로서 이러한 난국을 타계해갔다.

1432년 천문관측기구인 간의(簡儀), 1433년 간의의 발전시킨 혼천의(渾天儀), 1434년 구리활자인 갑인자(甲寅字)와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 1436년 납활자인 병진자, 1437년 천문관측기구 대간의(大簡儀), 해시계인 양부일구·현주일구·정남일구, 1438년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더욱 정교하게 개선한 옥루(玉漏), 1941년 강우량을 측정하는 우량계인 측우기(測雨器)와 물의 깊이를 측정하기 위해 돌기둥에 눈금을 새겨 강의 다리교각에  매어 고정시킨 수표(水標) 등이 장영실의 대표적인 발명품이다.

조선시대는 전통적인 농경문화 사회였다. 그러한 이유로 그 당시 농업과 관련이 깊은 천문학은 가장 중요한 학문적 흐름이었다. 장영실의 발명품은 대부분 천문학을 이론적 근간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농사를 짓고 삶을 영위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었다.

특히, 측우기(測雨器)는 이러한 면에서 의미 있는 발명품이다. 당시 측우기의 발명으로 전국 곳곳에  비가 내린 양을 통일된 정확한 기준에 의거해서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측정된 수치는 전국 각각의 지역마다 농사에 필요한 물의 양을 예측하고 조절할 수는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였다. 장영실의 측우기는 정확한 강우량 측정을 통해 농업의 과학화에 절대적인 기여를 한 의미 있는 발명품이며, 1639년에 발명된 유럽 최초의 카스텔리(castelli)의 우량계보다 200년 앞선 우량계(비의 양을 재는 기계)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자격루 (출처 : www.flickr.com , Kai Hendry)

천재공학자 장영실의 발명품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 역사상 최초의 자동 물시계 자격루(自擊漏)의 개발일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해와 별 등의 관찰을 통해 대략적인 시간을 예측하며 생활했다고 한다. 이러한 시간 측정법으로는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을뿐더러 날씨라도 흐린 날에는 아무런 대안이 없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세종대왕의 정확한 시간을 알고 싶어 하는 염원과 장영실의 열정으로 탄생한 자격루의 기본원리는 다음과 같다. 윗부분의 물그릇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아래의 그릇으로 흘러 유입되면서 부력(浮力)으로 내부에 설치되어 있는 막대를 띄운다. 막대의 힘은 다시 지렛대와 쇠구슬에 전달되어 시각을 알리는 장치에 충격을 가하는 구조이다. 이것은 15세기 제어계측 공학적 개념의 극치를 보여주는 발명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회복할 수 없었던 뼈아픈 실책

타고난 재능과 일에 대한 열정으로 관노에서 대호군(종3품 : 현대 정부기관의 이사관 또는 국장급의 직책)으로 거듭났던 입지전적의 인물 장영실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건 1442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세종대왕이 탈 가마를 제작하는 프로젝트의 관리·감독자로 전격 발탁된 장영실의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다. 그러나 완성된 가마에 세종대왕이 타자 가마가 부서지는 대형사고가 벌어지고 말았다.

‘모난 돌이 정 맞는 격이었을까?’ 조선의 주류이자 절대 권력집단인 문신사회에서 관노이자 기술자 출신인 장영실을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문신집단에서 주장하는 장영실의 죄명은 불경죄(존경과 경의를 표해야 할 사람에게 불손한 말이나 행동을 함으로서 성립하는 죄)였다. 당시의 불경죄 적용은 세종대왕이 가마를 타고 종묘를 지나던 도중 가마가 부서졌고, 그 결과 다행히 세종은 부상을 당하지 않았으나 용포에 진흙이 묻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장영실의 불경죄를 조사한 의금부에서는 형률에 의거 100대의 곤장을 쳐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동안 든든한 버팀목이자 후원자였던 세종대왕은 장영실의 곤장 100대를 80대로 감형해 주었다. 세종의 관용은 딱 거기까지 만이었다. ‘그토록 총애하고 아끼던 장영실을 조금 더 도와 줄 수는 없었던 것일까?’라는 안타까운 의문이 남는다. 어찌됐든 이 사건 이후 장영실은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가 남긴 교훈

장영실, 그의 마지막이 좋지 못했던 건 사실이다. 삶의 정점에서 무참히 무너졌다. 하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큰 의미가 있다. 그는 미천한 노비 출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비관하거나 굴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찾아서 즐기면서 수행했다. ‘낮에는 자신에 주어진 일을 열심히 수행하였고, 하루의 일과를 마친 후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병기창고의 녹슬고 망가진 병장기와 공구들을 깨끗하게 정비하였다. 이러한 행실로 주변사람들에게 큰 신임을 얻었다’는 동래현 소년 관노시절 장영실의 일화는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찾아보자. 그리고 즐기면서 일해 보자. 우리에게도 성공의 그날이 펼쳐질 것이다.

시민기자 최세용(csy006@naver.com)

OPEN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제4유형: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본 공공저작물은 “공공누리” 제 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목록보기
만족도 조사
이 페이지에 대한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평가 1명 / 평균 1
의견글 작성
의견글을 작성해 주세요.
최대 500자 / 현재 0자
  • 계산하여 답을 쓰세요
※ 불건전한 내용이나 기사와 관련 없는 의견은 관리자 임의로 삭제할 수 있습니다.
뒤로가기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