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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한탄강의 기적이었다!
2021-02-26 조회수 : 4917
시민기자 서상경

한탄강지질공원센터 오른쪽에는 자그마한 규모의 기념비가 있다. 한탄 이호왕 박사의 흉상과 한탄바이러스 기념비 그리고 ‘한탄강의 기적’을 새겨놓은 글귀 표석이다. 2007년 10월 한탄 이호왕 박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영북면 자일리에 세웠던 것을 최근에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한탄강의 기적’ 표석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길고도 너른 한의 여울 통일 염원 흐르는 한탄강변엔 한탄바이러스가 주인이라 했나 보이지 않는 적과 씨름해온 45년 사람 살리는 외길 인생 걷는 동안 병원체 발견과 예방백신 개발에 맑은 지혜를 쏟으신 이호왕 박사, 유행성 출혈의 공포 속에서 세계를 구한 내 조국의 과학자는 숭고한 업적 기어이 남기셨으니 한탄바이러스라 이름 지으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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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탄 이호왕 박사  ⓒ시민기자 서상경

한탄강 유역에서 심각한 질병이 나타나 국제적인 문제가 된 것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이었다. 중공군과 북한군,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들이 얽혀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수백 명의 군인들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 3,200명의 유엔군 장병들이 병에 걸려 500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공산군 측 피해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상당했다. 이 병에 걸리면 두통과 오한, 고열, 구토와 복통이 나타나고 소변이 잘 나오지 않으며 혈뇨와 혈변을 하거나 몸속에 침투한 바이러스로 인하여 장기에 출혈을 일으키는 등 상황이 심각했다.

이를 유행성 출혈열이라고 불렀는데 환자가 처음 발생한 것은 1913년 소련의 블라디보스톡이었다. 그 후 1936년 만주를 지배했던 일본 관동군에서도 괴질 환자가 속출했다. 주로 동북아시아에서 발생했고 일본의 731부대는 이를 세균전의 하나로 활용하기 위해 인체실험까지 감행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부터 미국에서는 많은 예산과 연구진을 투입하여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였으나 숙주가 들쥐일 것 같다는 추정 외에는 병원체를 밝혀내지 못했다. 1967년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연구에 뛰어든 의학자가 이호왕 박사였다.

2▲한탄바이러스 기념비  ⓒ시민기자 서상경

1928년 함경남도 신흥에서 태어난 이호왕은 함흥 의과대학을 다니다가 월남하여 서울에서 의학 학위를 받았으며 1955년 미국으로 유학했다. 그리하여 1959년 미네소타 주립대학교 미생물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처음에는 일본뇌염을 연구했는데 한발 앞서 일본에서 뇌염 백신이 나오는 바람에 연구는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1969년에 미 육군성의 지원을 받아 미국 연구진들이 실패한 유행성 출혈열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동안 미국에서 연구했던 자료를 면밀히 살펴보고 야생쥐와 그에 기생하는 진드기, 벼룩 등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 불철주야 연구에 매진하였다. 하지만 6년이 지나도록 진전이 없었다.

3▲한탄강  ⓒ시민기자 서상경

미국은 우수한 의학자 200여 명이 6년에 걸쳐 연구했는데도 성공하지 못한 유행성 출혈열의 병원체를 불과 7명의 연구원으로 찾아내는 일은 어쩌면 무모한 일이었다. 하지만 민간인들까지 많은 희생자가 속출하고 있어 누군가 반드시 해야 했다. 우선 유행성 출혈열이 발생한 군부대 주변에서 들쥐를 잡아들였다. 들쥐는 야행성이라 밤중에도 덫을 살펴야 했는데 어느 날 간첩으로 몰려 사살당할 뻔한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한탄강 주변은 전쟁이 끝났지만 전시와 마찬가지로 긴장이 흘렀고 군인들의 경계 또한 삼엄했던 것이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1976년 들쥐의 폐에서 원인 바이러스를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병원체의 발견은 문제 해결의 시작에 불과했다. 바이러스를 찾았으니 이를 물리칠 백신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다시 10년의 세월 동안 연구를 거듭하여 인체에 해롭지 않으면서 항체를 형성할 수 있는 백신을 세상에 내놓았으니 이것이 한타박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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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방향으로 이호왕 박사, 등줄쥐, 유행성출열열 분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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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북면 운천성심병원  ⓒ시민기자 서상경

한탄 바이러스는 한탄강에서 나온 이름이다. 새로운 바이러스를 발견한 사람은 그 이름을 정할 권리를 갖게 되는데 이호왕 박사는 여기에 자신의 이름이 아닌 한탄강의 이름을 붙였다. 한탄 바이러스라는 병원체는 한탄강 주변에서 발견했고 휴전선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의 한을 드러내는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노회하여 자주 찾아오시지 못하는 이호왕 박사를 바로 곁에서 지켜본 운천성심병원 이봉석 원장은 벅찬 감격으로 당시를 회상하였다. “유행성 출혈열에 걸린 사람들이 우리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백신이 없으니 모두 고생들을 많이 했어요. 한탄 바이러스는 한탄강유역의 등줄쥐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이후에 집쥐로부터 발생된 서울바이러스도 찾아내고 많은 사람들 목숨을 구한 계기가 되었죠. 유행성 출혈열이 전 세계에 다 분포하고 있었거든요.”

1979년 12월 서울 시내 아파트 경비실에 들어온 집쥐를 막대기로 때려잡은 경비원이 5일 후에 유행성 출혈열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발생하자 전 세계의 집쥐, 연구실에 있는 실험용 쥐까지 모두 조사를 벌여 한탄 바이러스와 유사한 병원균임을 밝혀내기도 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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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천성심외과 이봉석 원장  ⓒ시민기자 서상경

이러한 위대한 업적을 포천의 뜻있는 학자들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야생 들쥐를 찾아다니던 영북면 자일리 기갑여단이 있던 자리에 처음 이호왕 박사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고 글씨도 새겨놓았던 것이다. 한탄강의 기적 표석의 글씨는 서예 공부를 했던 이봉석 원장이 직접 썼다고 한다. ‘질병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고 말하며 미국의 귀화제의를 거부하고 국내에 머무르면서 한국 의학을 세계에 떨친 선생의 애국정신은 후학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1960~70년대 과학의 불모지와 다름없었던 우리나라는 연구환경도 열악했고 수도와 전기조차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으며 기름도 없이 구공탄을 때면서 연구에 매진했는데 그럼에도 세계의 학사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으니 이를 한탄강의 기적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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