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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 선생을 중심으로 되새겨보는 제83회 순국선열의 날

시민기자 유재술

 


온 겨레 나라 잃고 어둠속 헤매일 때

자신을 불살라서 횃불마냥 밝히시며
국내외 광복전선서 오롯이 목숨 바친
님들의 그 충절이 겨레의 얼 지켰네
우리는 순국선열을 우러러 기리면서
그 후예다운 떳떳한 새 삶을 다짐한다.

 

올해로 제83회를 맞는 순국선열의 날 노래의 1절이다. 일본제국주의 한반도 강점이 지속되어 이 땅의 민초들 고통이 날로 심화되던 1939년 11월 21일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제국의 망국일인 11월 17일을 순국선열 공동기념일로 제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동안 정부부처와 민간단체로 주관이 이전을 거듭하다가 1997년 정부기념일로 복원되어 현재는 국가보훈처에서 주관하며 금년에도 세종문화회관에서 기념식이 진행되었다.

ⓒ시민기자 유재술

일제는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을 강압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를 설치하는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했는데 우리는 이를 굴레 늑(勒) 자를 써서 을사늑약이라고 부른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가열찬 투쟁이 들불처럼 일어났는데, 순국선열이라는 말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거하다 목숨을 바친 열사’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런 의미심장한 날에 우리 포천에서 일제에 항거하다가 목숨을 바친 열사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것도 매우 뜻깊은 일이 될 것이다.

ⓒ시민기자 유재술

나라의 독립을 우해 목숨을 바친 이들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마는 우리 고장을 대표하는 독립투사로 면암 최익현 선생을 꼽는 것에 주저할 사람을 아마 없을 것이다. 오늘은 면암 선생의 나라 위해 희생하신 여러 흔적을 되새겨 볼 수 있는 청성역사공원의 동상과 가채리 채산사, 그리고 선생이 태어나신 생가터를 중심으로 탐방을 해보려 한다.

ⓒ시민기자 유재술

포천시민 누구나 즐겨 찾아 휴식을 즐기는 청성공원 내의 약수터 부근에는 2000년 4월 건립된 선생의 동상이 있다. 면암선생의 숭모사업회가 밝힌 건립 취지는 다음과 같다.

“선생은 이 고장이 낳은 한말의 거유로서 춘추대의와 위정척사 사상으로 정치와 강상을 바로잡고자 상소 투쟁을 하시고 기울어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고자 일제와 싸우시다 대마도에서 아사 순국하여 충절의 표상을 보이시고 의를 실천하신 분이 십니다. 이 분의 높고 거룩한 뜻을 근 백 년이 지나도록 기리지 못하여 안타까워하던 중 뜻있는 이들이 의기를 돋우어 성금을 모으고 국가보훈처와 포천군의 지원을 받아 이 동상을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옷깃을 여미고 숙연한 자세와 경건한 마음으로 이 분의 고귀한 뜻을 받들어 맑고 바른 사회를 일구는 바탕으로 삼읍시다.”  [건립기 전문. 1999년 12월]

ⓒ시민기자 유재술

그런데 이 동상이 이곳에 건립된 배경은 무엇일까. 선생이 태어나신 생가 터는 신북면 가채리에 따로 있고, 채산사라는 사당 또한 같은 동리에 자리하고 있는데, 현재의 위치에 자리한 이유가 다소 궁금하다. 이에 대해 한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생의 동상이 건립되던 당시 가채리는 도로 사정이 현재의 위치보다는 좋지 못해서 시민들의 접근성이 다소 떨어졌다. 그러므로 많은 시민들이 휴식을 위해 찾아오는 이곳이 보다 적지라고 여겨졌으며, 또 당시에는 이곳의 약수가 좋아 많은 시민들이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 물을 뜨러 오는 경우가 많아 다수의 일반 대중에게 선생의 나라사랑에 대한 깊은 뜻을 알리는데 보다 효과적이라고 의견이 모아졌다.” 23년 전의 일이니 지금의 기준으로 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럼 우리는 선생의 일생에서 어떤 공이 있어 흠모하고 그 뜻을 높이 기려야 하는 것일까.

“면암선생의 삶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표본이다. 또한 효의 도리와 형제간 우애를 실천하는 효제정신(孝弟情神)의 표본이시기도 한다. 충(忠)의 화신으로 진충(盡忠)의 정신을 실천하신 분이시고, 정론직필의 정직한 성품이 자리한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실천하신 분이시다.”라고 면암숭모회 양호식 전 회장은 밝힌다.

ⓒ시민기자 유재술

다소 이해가 어려운 말이다. 이는 선생의 생애를 구체적으로 살펴봐야만 이해가 자연스러울 것이다.

‘본관이 경주 최씨이며, ’토황소격문‘으로 유명한 최치원의 후손으로 1833년 가법리, 지금이 가채리에서 태어나 2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했다. 이후 두루 청요직의 벼슬을 거치면서 불의와 부정을 척결하는 강직성을 보여주었고, 이는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의 불가함을 대궐 문 앞에 도끼를 들고 엎드려 그 부당성을 외치는 이른바 ’도끼상소‘로 나타났다. 이로 인해 흑산도로 유배되는 등 정치사에서 그의 강직성으로 인해 유배와 해배를 거듭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905년 을사년에 일어난 일본의 강압적 조약의 무효와 이에 동참한 박제순, 이완용 등의 을사5적의 처단을 주장하며 7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전라도에서 의병장 임병찬과 함께 항일 의병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항일의병운동은 왜놈 헌병대에 저지당하고 결국 체포되어 대마도로 압송되었다가 왜놈이 주는 물과 음식은 먹을 수 없다, 거절하여 끝내는 그곳에서 굶어죽어 순국하였다.

선생의 시신이 대마도를 떠나 고국으로 운구될 때는 대마도 원주민들의 대부분이 나와 전송을 했을 정도였으며, 부산항에 도착하자 모든 시장이 철시를 하고 애도했으며 선생의 시신이 당도하는 곳마다 선비들이 모여들어 총독부가 폭동을 우려하여 충남 논산에 가매장하여 선비들을 강제해산시키고 2년 뒤 예산군에 안장될 수밖에 없었다. 순국 후 선생의 우국충정을 추모하기 위한 사당이 전국 곳곳에 세워져 청양의 모덕사를 비롯한 정읍의 무성서원 등 20여 곳이나 된다.’ [‘포천의 중심, 신북’에서 발췌]

결국 선생의 시신은 그 고향인 포천에는 당도하지 못하고 멀리 타향 예산에 잠들어 있다. 선생의 시신을 고향으로 모셔오는 길은 없을까.

ⓒ시민기자 유재술

이어 선생의 사당이 있는 신북면 가채리 채산사로 향한다. 원래 1906년 순국하시던 해에 건립되었으나 일본군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35년 일제강점기에 다시 재건하였으나 1943년 다시 일본인에 의해 훼철되기를 거듭하다가 1975년 복원하였고 1986년 최면식 선생이 서향으로 모셔져 봉안되었다.

ⓒ시민기자 유재술

독립운동가인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최면식 선생도 일찌감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는데, 만주로 망명하여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으는 임무를 수행 중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르다가 3.1운동을 맞이했고, 출옥해서는 더욱 더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해방을 2년여 앞둔 1943년 종로경찰서에 붙잡혀 갖은 고문을 당하는 등 옥고를 치르다가 그 여독으로 운명하셨다.

ⓒ시민기자 유재술

한 시대의 정론직필의 춘추대의와 위정척사에 빛나는 항일 독립운동가와 그의 항일운동을 계승하여 만주 등 국내외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사한 손자. 모두 이 시대의 표상이 아니겠는가.

ⓒ시민기자 유재술

전국적으로 순국선열의 날 행사가 열리던 그날 밤 우리 포천시에서도 중앙도서관에서 ‘면암 최익현 선생 순국 제116주년 추모식’이 거행되었다. 선생의 숭모사업회의 주관으로 진행된 행사는 경기도의회 윤충식 의원을 비롯한 이종훈 포천문화원장, 김광열 포천농협 조합장, 선생의 유족 등 각계 인사가 참석하여 그 의미를 더했다.

ⓒ시민기자 유재술

인사말에서 박낙영 숭모사업회 회장은, “선생의 순국 116주년을 맞는 요즈음의 시대는 세계열강들의 위협 속에 혼란에 빠졌던 대한제국의 시기와 비슷하다. 그러나 북한의 미사일 발사 등의 이유로 일본의 군대와 연합훈련을 계획하는 등의 시대상황이 과연 선생의 우국충정에 입각한 순국의미에 부합되는 것인지 의문스럽다.”라고 말했다.

ⓒ시민기자 유재술

윤충식 의원은, “현재 면암 선생의 숭모사업회가 주관하고 주최하는 추모식이 내년부터는 포천시 주관하에 숭모사업회가 주최하는 것으로 발전되어 더욱 많은 시민들이 참석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라고 축사를 했다.

ⓒ시민기자 유재술

이어진 답사에서 최진욱 유족 대표는, "충남 예산의 광시면에 외롭게 모셔져 있는 선생의 유해를 하루라도 빨리 고향으로 모셔오면 좋겠다."는 소원을 나타냈다.

우리는 아직 일본으로부터 제대로 된 반성의 사과나 보상을 받은 적이 없다. 1995년 무라야마 전 일본 총리가 한 형식적이며 도의적 사과를 아베 전 총리는 이마저도 침략을 부정하는 등 특유의 망언으로 뒤집었다.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고 말한다.

그러나 솔직한 반성과 진실의 사과도 없이 지나간 과거는 잊고 무조건 미래로 나갈 수 있을까. 원수진 개인 간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 강제 점령당해 수많은 고통을 겨레가 36년을 감당해야 했는데 그렇게 쉽게 국가 간에 망각되어지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고 옳은 일일까. 그것이 면암 선생의 정신일까. 올해로 순국 116년을 맞는 해에 면암 최익현 선생의 항일 순국선열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참고자료 – 국가보훈처 2022.11.16. 보도자료, 포천문화사랑 통권 제 131호, 2022년 발행 포천의 중심 신북, 1997년 발행 포천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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